길을 가다 멈칫합니다,
고개를 갸웃합니다,
귀를 기울입니다.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있는 듯한데 금세 알아차리지 못하고 얼음(!) 상태에 갇혀버립니다. 만사를 제쳐 두고, 무슨 일이 무슨 일인지 알아내지 않고는 도저히 배기지를 못하겠습니다. 달팽이관에 잡힌 어떤 선율에
미모사처럼 반응하는 몸의 한 부분! 마음결 한 가닥이 가늘게 떨고 있습니다.
‘뭐였더라, 익숙한 이 선율은...... 그래, 바로 그 노래야!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그 노래! 피보 브라이슨의
‘If Ever You’re In My Arms Again!’
네, 저에게 ‘If Ever ~’는 이성보다 세포가 먼저 반응하는, 몇 안 되는 노래 중의 하나랍니다.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건 아주아주 오래 전이예요. 가요와 팝송이 다르다는 것만 막연히 알 무렵, 그러니까 취학 전이었나 봅니다. 이 노래를 들을 때면 떠오르는 아버지! 아버지 얘기를 빠뜨릴 수가 없네요. 아버지께서는 실향의 한과 시름을 달래시려 늘 라디오를 틀어 놓고 주무셨습니다. 망향의 동산인가, 그 비슷한 제목의 프로를 즐겨 들으셨는데, 자정 무렵의 망향의 동산은 아버지와 같은 슬픔을 지닌 사람들의 사연과 함께 흘러나오는 노래도 죄다
서글프고 구슬펐던 기억입니다. 듣고 싶지 않아도 꿈나라에 가기 전까지는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창호지 문을 투과하여 들려오던 그 노래들, 밤이면 한결 서글프고 음울해지는 가락을 자장가 삼아 잠들던
철부지 시절.
그 어느 날이었던가요. 한밤중 화장실이 가고 싶어 잠에서 깨었습니다. 슬리퍼를 꿰고 마당으로 나갔지요.
화장실까지는 무서워 차마 못 가고, 화단 한편에서 시원스레 갈등을 해결하며 무심코 밤하늘로 시선이 가 닿았는데, 밤하늘은 실로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달이 밝았는지 어땠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금세라도 쏟아질 듯한 별빛들로 가득한 하늘을, 손 내밀면 닿을 듯 가깝게 느껴지던 거대한 별들의 무리를, 하필 그 순간, 두려움과 경탄 속에서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어쩜 저리도 총총할까? 별을 소쿠리째 담아와 마구 뿌려 놓았나...... ‘
해사한 미소, 총명한 웃음, 명멸, 결 고운 옷자락을 펼쳐 움직임 없는 움직임으로 별하늘을 아우르던 은하수에 반해, 잠들기 싫던 그 밤! 우주의 신비에 취한 꼬마에게 잠은 무의미한 시간 낭비로 느껴졌습니다. 두 눈 가득 별 하늘을 담아, 깨어 있을 수만 있다면......
하지만 밀려오는 졸음을 이길 수는 없었어요. 별들과 미리내와의 아쉬운 눈인사, 그리고 마루로 올라서던 그 순간, 때마침, “If Ever You’re In My Arms Again” 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거였습니다.
~We had a once in a lifetime, But I just couldn’t see, Until it was gone~
‘금발의 미성인 가수.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반드시 금발일 거야.’
엉뚱한 추측은, 클라이맥스의 ‘If ever you’re In my arms again, This time I’ll love you much better’ 부분이 나올 무렵, 확신으로 굳어갔습니다. 환상 속 금발의 가수가 밝은 미래를 희망차게 노래하는 모습은,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과 갈증을 안겨 주기에 충분하였어요. 제목도 가수도 모르는 팝송이 별과 은하수에
감성을 적신 어린이에게 미끄러지듯 스며들었다고나 할까요.
'다시 한번 듣고 싶어, 그 노래!’
그 후로 시작된, 그저 소극적인 가슴앓이. 인터넷도 유튜브도 모르던 시절, 제목도 가수도 모르는 노래 한
곡을 찾아내는 것은 너무 막연했습니다. 라디오나 TV, 전축 말고는 음악을 접할 매체가 달리 없었으니까요.
‘If ever’는 다른 섹터에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술래의 마음을 애태우는 술래잡기 놀이의 고수 같았어요. 기나긴 터널을 지나 한 줄기 빛을 발견한 건 요즘 흔히 말하는 동시성이었을까요? 진한 그리움 한
페이지였던 피보 브라이슨의 노래를, 성인이 되어 어느 카페에서 들었을 때 용수철처럼 튕겨져 나가 카페지기에게 다급히 물었습니다.
“방금 그 노래, 제목하고 가수 좀 알 수 있을까요?”
대체 그 용기는 어디서 생겨난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특합니다. 추적자의 닦달에 카페지기는 케이블
방송을 검색하는 듯하더니, 겨우 ‘if ever’와 피보 브라이슨만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래도 절반은 성공한
셈이니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심정이었어요.
겨우 제목 두어 소절과 뮤지션의 이름만 품고 기다리던 소극적인 지구인에게, 인터넷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감사하게도 팬카페의 신청곡 코너란 게 있더라고요. 아, 구원투수가 따로 없었지요. 노래에 얽힌 사연과
제목 두어 단어만을 올리며 지기님의 능력껏 찾아 주십사 부탁을 드렸고, 드디어 감격의 상봉(!)을 할 수 있었어요. 카페지기님, 당신을 능력자로 인정합니다! 세포가 먼저 반응하는 노래를, 부족한 힌트로 찾아서 안겨
주었으니 진정 능력자가 맞겠지요?
그토록(소극적 열정이라 부르려 합니다만......), 찾아 헤매던 노래가 피보 브라이슨의 노래임을 알게 되었을 때, 감미롭고 힘찬 음성의 주인공인 그가 금발이 아닌 것을 알았을 때, 실망스럽지 않았나 혹여 궁금해하실지도 모르겠네요. 뭐, 환상은 한낱 환상일 뿐이니까요. 다만 노래를 처음 듣던 날 첫 삽을 떠 올려 완성한 환상의 근거는 대체 무엇인지가 이상하고 궁금할 뿐입니다. 도깨비장난이었을까요? 별과 미리내가 흩뿌린 요술가루 덕분일까요?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별빛이 쏟아지는 밤, 순수한 어린아이 마음으로 ‘If ever you’re In my arms again’을 듣고 싶습니다.
아버지와 피보 브라이슨의 보이스, 그리고 몸체보다 더 커다란 건전지를 등에 매달고 있던 아버지의
라디오가 동시에 존재하던 그 당시로 훌쩍, 마실을 다녀올 수 있게요......
https://youtu.be/EbLHekvAK4Y?si=VHJzMhrqoo9utEy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