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과의 적당한 거리 두기
내가 결혼하기 전 시댁은 그냥 막연하게 어려운 곳이었다.
하지만 결혼 준비와 동시에 그 어려운 곳에선 나를 수시로 압박해 왔고,
이는 나의 임신기간과 겹쳐서 절정이 되었다.
내가 살면서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던 새로운 양상의 인간 모습이었고
어려서부터 보통의 아이들보단 꽤나 어려운 환겨에서 꿋꿋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해 오던 나는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냥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끝내고 싶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피폐해졌다.
힘들었다.
힘들던 그 시절 나는 끊임없이 시댁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내 마음으로도, 나와 생각이 통하는 사람에게도.
하지만 그런 말을 거듭하여도 내 마음속 불편함은 줄어들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시댁과의 불화로 남편과의 갈등도 극단으로 치닫던 차,
나는 그런 문제에 특화되어 있다는 네이트판에 내 구구절절한 사연을 토로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시댁을 나와 같이 욕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했던 것 같다.
몇몇 위로하는 댓글들 사이에 이런 글도 보였다.
"결국 끼리끼리 임"
그 댓글이 내 마음을 찔렀고 항변이 수천 마디 떠올랐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 시댁을 욕하면 그 시댁에서 태어난 남편과 결혼한 내 욕을 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
그래서 나는 불만을 토로하던 것을 그만두었다.
시간이 지나고,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와 함께 나를 지키는 것을 강화하고
남편도 시간이 지나며 시댁에서 만의 사고방식을 벗어나 조금은 변화했다.
그리고 내게는 부정적인 곳이지만, 아이에게는 조부모이기도 하기에
아이가 직접 겪지도 않은 일로 조부모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갖는 것은 지양하였다.
여전히 사소한 마찰은 있지만 최소한의 타협점이 생겼고,
나는 그 이외에 시댁이라는 존재 자체를 내 일상에서 지우는 것으로 나를 지켰다.
나는 원래 예민하고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그리고 자라온 환경에서 어려서부터 이런 특성을 갈고닦을 수 있게 눈치를 보며 자라왔다.
무슨 점쟁이처럼 척하면 척 까지는 아니지만,
사람을 대할 때 말투, 표정, 뉘앙스 이런 것이 모두 정보로 입력되어
그 한마디 한마디에 긍정적, 부정적 뉘앙스를 자동으로 느낄 수 있다.
물론 이런 점은 나의 인간관계를 좁게 하는 큰 요인이기도 하나,
낯선 이를 대할 때 그 '싸함'을 느끼는 것엔 특화되어 위험을 회피하기에 최적화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시댁과의 관계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나의 특유의 예민함이었다.
시댁, 이라고 지칭하지만 직접적으로는 시어머니와 갈등이 있었는데
초반의 직접적인 비난과 경멸, 화를 낼 때는 처음엔 참다가 나도 같이 화내다가.. 그랬었다.
간략하게 이 관계는 절대로 변하지 않겠다고 결정적으로 새겨 넣은 사건을 간략히 소개하겠다.
어느 공휴일이었다. 그 전날 갑자기 와서 식사하고 가시겠다고 하기에
점심 식사로 괜찮을 곳을 검색하여 모시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때도 갈등이 치닫던 때로, 나는 그 갈등에서 끝내기 위한 한 방법으로 당시 신혼집으로 마련한
전세금의 50%를 보태주었던 시댁에서 벗어나기 위해 친정으로 이사를 준비 중이었다.
당시 신혼집에 불쑥 찾아오려고 하고 우리가 없을 때 집에 찾아와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는다고 분개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모두 보태준 돈 때문이라는 생각이었다.
대출을 더 받더라도 그런 압박에선 벗어나고 싶었다.
시어머니는 시댁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면 돈을 더 보태주신다고 하셨다.
나는 집을 옮기는 것은 우리의 자유이고,
복직도 해야 해서 친정에 아이를 맡길 겸 친정 근처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대뜸 우리 집에서 자고 가야겠다고 하셨다.
당시 신혼집은 부엌을 제외하고 방 두 개의 집이었는데,
한 방은 보일러가 고장 난 상태여서 옷방으로 쓰고 있었다.
나머지 한 방이 우리가 생활하는 곳으로 침대와 티브이, 에어컨 등
작은 집에 혼수가 가득 차 있어서 사실 친구들의 집들이도 공간이 없어 못할 정도로 협소했다.
부엌은 길쭉하게 요리할 가스레인지와 싱크대가 있고,
작은 2인용 식탁이 있어 도대체 어디서 자겠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본인은 현관 앞 좁은 곳에서라도 자야겠다고 고집 피우셨고, 나는 거절했다.
덧붙이자면 시댁과 신혼집의 거리는 차로 30여 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다.
말이 안 통하고 자리가 불편해져서 밥도 못 먹고 있는데,
시어머니의 한마디가 귀에 들어왔다.
"내가 왜 우리 집에서 잠도 못 자고 가는데!"
난 그 자리로 남편에게 소리를 지르고 아이를 챙겨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대로 집에서 짐을 챙기고 친정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훗날 조율을 위해 시댁에서 남편과 함께 대면했지만,
시어머니는 그날의 대화를 녹음했더랬다.
그냥 같이 밥을 먹으러 온 것이 아니라 덫을 놓으려고 찾아왔다는 생각이 확 들며
그 후로 나는 시댁을 거의 2년여간 보지 않았다.
사람을 갖고 노는 것 같은 그 모습이 소름 끼쳤다.
그 사이 아이가 자랐고,
남편은 명절에라도 시댁에 방문하길 꾸준히 원했다.
난 여전히 끔찍한 기억이 남아있어 싫지만, 아이와 남편을 위해 1년에 명절 두 번.
아이 앞에서 거친 말을 하면 바로 돌아온다는 전제하에 시댁을 방문했다.
다행히,
아이가 보고 싶었던 건지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가서 아이를 보는데만 집중하다 돌아온다.
물론 그 어떤 사과는 없었다.
초반의 명절에만 가는 것을 지나,
가끔은 친척 결혼식을 가며 만나기도 하고 두 분의 환갑은 챙겨드렸다.
환갑은 우리 친정부모님과 같은 정도를 맞추기 위한 노력이었고,
결혼식은 남편과 아이만 보내고 싶었지만 아이가 나 없이는 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선 딱히 문제가 생길 것 같진 않았다.
그렇게 지내던 차, 나는 또 거슬렸다.
이번 추석 시댁에 갔다가 시어머니한테서 "너 살쪘니?"라는 말을 들었다.
난 난처한 질문엔 최대한 답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웃자고 넘기자니 기분 나쁘라고 한 말 같고,
쏘아붙이자니 애매한데 나만 가시 돋은 사람이 될 것 같다.
남편이 나 대신 방어를 했지만 도대체 그런 말을 왜 꺼낸 건지 알 수 없었다.
왜냐면 나는 전혀 살이 찌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관리엔 철저한 편이라서 운동을 열심히 하는 건 아니지만,
일상의 생활 패턴을 유지하며 건강을 추구하고 있어 내 몸무게는 20대의 그것과 동일하다.
그랬으니 덜 화났겠지만,
반대로 내가 실제 살이 쪘다면 더더욱 삼가야 하는 말이 아닌가 싶었다.
굳이...?
그렇게 남편에게만 아쉬움을 터놓고 또 며칠 흘렀다.
올해는 추석이 지나고 얼마 안 되어 친척 결혼식이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꾸며 입고 몇 년 만에 신는 건지 기억 안나는 구두를 신고 갔다.
시어머니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 키가 크신 편이다.
다리가 긴 체형이라, 아들 둘이 모두 어머니를 닮아 키가 크고 다리가 길다.
그리고 그것이 자부심인 것 같다.
우리 아이는 조금 평균보다 조금 작은 키인데,
결혼식장에서 보자마자 아이가 많이 큰 것 같다며 반에서 제일 크지 않냐고 칭찬하셨다.
추석때와 비교했을 때 실제로 많이 크지 않은 상태라서 나는 조금 난처했다.
그래도 아이의 칭찬이니 그냥 웃으며 대꾸했는데,
아이가 금방 자라서 엄마키를 금방 넘겠다고 말하셨다.
"엄마가 작으니까 oo 이는 금방 엄마보다 더 크겠네~"
실제로 나는 크지는 않지만 작지도 않다.
검색했을 때 내 나이의 딱 평균 키만 하다.
그래서 크면서 작다는 소리를 한 번도 들은 적 없다.
물론 남자들의 평균에 대비했을 때는 작지만, 여자로서 작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어서
시어머니의 불쑥 튀어나온 그 말이 조금 의아할 정도였다.
그리고 오랜만의 신은 구두로 그날의 내 키는 거의 170에 임박했다.
몸무게도, 키도, 전혀 나의 콤플렉스가 아니었기에
그걸 콕 집어 말한 것이 나에게 큰 상처는 아니었다.
하지만 묘하게 기분이 나쁘기에 생각해 보니 시어머니가 자꾸 나를 찔러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본인은 미리 준비한 녹음기를 켜놓고 날 도발했던 그날처럼,
자꾸 날 작고 뾰족한 바늘로 찔러보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서 나는 어머니가 자꾸 불필요하게 선을 넘는다고 남편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게 큰 말이 아닌 만큼 애매한 수준이라
남편도 기분이 나쁠 수 있다는 것은 수용했지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는 곤란해했다.
12월에 연말을 맞아 시댁식구들과 식사 자리를 갖기로 했었다.
최근 갑자기 다른 일로 터진 울화에 시어머니의 따끔한 바늘도 같이 연관되어 터져,
나는 그 자리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사실 남편과 타협한 것 이상으로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지금은 공황장애 약을 끊고 괜찮을 정도로 잘 지내는 나지만,
명절의 한 달 정도 전부터 평소와 다른 일이 없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한숨 쉬는 일이 늘어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명절에 두 번 아이를 데리고 얼굴을 비추는 것이 정말 최선이다.
올해는 이미 한 번의 결혼식장도 더 갈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그 이상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에게 별 말 아닐지라도 나를 상처 주려는 말을 한마디라도 더 듣고 싶지 않다고 전했다.
어차피 12월이 지나면 설날도 곧이다.
내 한계치를 넘은 바늘은 나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게 만들 수도 있다.
남편은 아쉬워했지만, 그 마음을 받아줄 여유는 아직 내게 없다.
이전의 나라면 아쉬워하는 남편에게 미안해하고,
내가 조금만 양보해 볼까 하면서도 내 마음이 불편한 것을 끌어안고 있어
마음이 요동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끊어내기가 가능해졌다.
거절, 그리고 차단하기로 나를 지키고 있다.
이러한 관계가 변화하려면
시어머니의 진심 어린 사과와 반성, 그리고 깊은 대화를 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10여 년을 겪어온 바,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감히 단언하게 되었다.
기대는 없다. 그저 나를 지키는 것에 집중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