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울제도 끝.

단약일지.

by 잉킴

이혼이 완료되지는 않았지만, 항우울제를 약 6개월 정도 복용해왔고 최근에는 과음으로 약 복용을 깜빡한 적도 있어 이제 단약을 해볼까 싶어서 GP에 가서 상담을 받았다.


약을 처방해줬던 의사선생님, 내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 알고있는 그 의사선생님과 상담하고 싶었지만, 이쪽 시스템에서는 그게 허락되지 않는다. 대기실에 앉아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생각보다 빨리 내 이름이 불려서 상담실로 들어갔다.

“단약을 하고 싶으시다고요?”

“네.”

“식욕이 너무 넘쳐서 그러세요? 하하.”

“네, 그것도 그렇고요.”

그리고 새 의사선생님은 내 진료 일지를 보고, 역시나 연민과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에게 지금 상태가 안전한지 다시 한 번 확인해주셨다. 그리고 여러 위급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연락처들을 알려주셨다.

“용량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으니, 본인이 괜찮다고 느끼면 그냥 끊으셔도 돼요.”

“정말요? 그럼 오늘부터 끊어야겠네요.”

십 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의사선생님과 편안하게 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모두가 자기 인생이 얼마나 힘든지, 자기 고통이, 자기 민족이, 자기의 하루가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알아봐주기만 바라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지쳐 있었다. 몇몇 사소한 일들로 내면에 깊은 인간 혐오가 자리 잡을 즈음, 그 짧은 상담이 내 기분을 산뜻하게 했다. 내가 환자라는 정당한 이유로, 전문가의 시각으로, 이상한 사심이나 뒤끝 없이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 진짜 별거 아닌 행복.


그 후, 어떤 지인은 내가 약을 끊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서둘러 괜찮은지 물어본다.

왜 그렇게 궁금이 나서 안달인지 모르겠고, 어떻게 이런 사생활까지 공유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연민을 표하면서 나보다 그 우울증의 세계를 잘 알고 싶은 척 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는 내가 부작용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것도 안다. 이런 사소한 인간 관계에 지쳐가다 보면, 그래도 가족만큼은 나를 잘 알고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생각이 또 꼬리를 물어서, 불안하고 불행했던 만큼 좋았던 전 남편과의 결혼에서 느꼈던 깊은 연대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이런 복잡하고, 부질없고, 부정적인 감정들이 나를 깊은 땅굴 속으로 밀어넣으려 할 때, 문득 '아 내가 약을 끊긴 끊었구나' 깨닫게 된다. 약을 끊고나니 지난 6개월동안은 약 덕분에 안정되고, 밝고, 힘이 넘치고, 이혼해서 후련한 약간의 조증 상태 였단걸 깨달았다. 6개월 전 약을 복용하기 시작하고 나서 내가 몸을 떨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던 것처럼.


지금은 기분이 밝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대로가 더 좋다. 원래 약간은 염세적이고, 세상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런 나의 시점을 되찾고 나니 진짜 나를 되찾은 것 같은 은근한 희열이 느껴진다. 밝은 나도 나였지만, 회색의 나도 나다. 결국, ‘나’라는 존재를 알고 ‘나답게’ 사는 게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동료들과 점심시간에 공원에서 와인을 마시고 후식으로 티라미수를 먹었다. 그날 먹은 음식이 2주가 넘도록 내 속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원래 위장이 튼튼한 편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설사와 울렁거림, 속쓰림으로 불편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몸이 지치다 보니, 누가 말을 걸어도 상대방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어지고, 에너지를 모두 휴식에만 쓰고 싶어졌다. 그리고 내가 유일하게 대화하고 싶은 사람은 보이스톡 너머의 엄마였다. 거의 매일 전화하지만, 요즘 속이 안 좋다는 얘기는 잘 하지 않았다. 엄마 걱정시킬까 봐 그런 이야기를 안 하는 효녀 이런건 아니고, 그저 그 주제가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던 중, 최근에 이렇게 말했다.

“아, 요즘 속이 왜 이렇게 불편한지 모르겠어.”

“너 그거 약 끊어서 그래.”

약을 끊고 나서 내 기분만 체크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엄마였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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