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각선생 Aug 26. 2023

고양이 집을 부탁해

나는 정리의 마법사다

2020년의 어느 날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어플에 있는 고객 요청서를 확인하던 중이다

1인가구 요청서만 클릭해서 보고 나머진 읽지도 않고 그냥 넘긴다

한참 넘기다가 뭔가 이상한 글을 발견하고 잠시 멈췄다

요청서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읽어 봤는데 보고 나니 마음이 심란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했다

왠지 내가 이 메시지를 그냥 지나치면 이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난 살짝 다른 사람의 감정에 잘 몰입하는 스타일이다

가끔 고객이 슬픈 고민을 토로하면 듣고 있다가 좀 전까진 없었던 근심이 나도 모르게 생긴다


나는 서둘러 고객에게 채팅을 남겼다

글을 확인한 고객은 내 핸드폰 카톡으로 집 사진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사진을 기다리며 속으로 반려동물이 고양이만 아니어라 빌었다

나는 동물 중에 쥐랑 고양이를 가장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알아본 결과 강아지 한 마리와 고양이 네 마리 그리고 자폐가 있는 고등학생 아들과

10평대 남짓한 빌라 반 지하에 살고 있었다

고객과 대화를 직접 나눠보니 살짝 무기력증이 느껴지긴 했으나 생활이 건전사람같았

고양이가 4마리 인 게 조금 걸리긴 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다른 컨설팅을 가도 앞으로 고양이를 만나게 될 테니 그냥 이 참에 적응해 보기로 했다

대신 안정장치로 고양이 안 무서워하는 동기 선생님 한 분을 설득했다

이번에 같이 가주면 일 끝나고 술 사준다고 꼬셔서 함께 가는 데 성공했다

참고로 동물 털 알레르기가 있거나 개와 고양이를 심하게 무서워하는 사람은 이 직업을 선택할 참고하기 바란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집이 생각보다 많다

가려서 일을 다니다 보면 결국 성장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 부분도 미리 염두두는 게 좋다

고양이는 이제 나에게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아직 만지진 못해도 가까이 오는 건 괜찮아졌다


전문가 둘이서 하루에 전체를 끝내긴 힘들 거 같았다

거실 겸 주방과 방 3개가 있었는데 원래 방 1개는 독립하기 전 딸이 쓰던 방이라고 한다

아직 딸이 쓰던 물건도 몇 가지 남아있고 고양이 용품과 고객님의 취미용품이 뒤섞인 창고방이 돼있었다


이 집에서 가장 정리가 시급해 보였던 거실과 창고방을 정리하기로 했다

나는 창고방을 맡고 선생님은 주방 겸 거실을 맡았다

그리고 아들과 고객님은 부지런히 쓰레기를 배출하고 컨펌했다


고객님은 비누향초를 만드는 분이었다

동물도 많고 정리가 안된 거에 비해 집에서 좋은 향기가 많이 났다

창고방을 고객님의 향초 작업방으로 만들어 드리기로 했다

그리고 이 방이 베란다가 딸린 방이라 털 날림이 심한 고양이들을 위해 베란다 창문에 캣타워를 붙였다

환기가 필요해 보였다

고양이 털이 어찌나 빠지는지 작업하는 내내 마스크만 서너 개 갈았을 정도다


베란다에 있던 오래된 김치 냉장고는 이번 기회에 버리고 싶다고 하셨다

근데 문제는 이 냉장고가 현관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사 올 때는 어떻게 했냐고 물으니 창문을 뜯어서 그리고 넣었다고 한다

여자 셋이서 밑에서 들어 올리면 위에서 받아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고객님이 집 근처 식당 사장님께 부탁해 본다고 나가더니 사장님을 진짜 모시고 왔다

젊은 남자 사장님이셨는데 참 세상엔 좋은 사람이 많다는 걸 느꼈다

한편으론 이런 도움을 흔쾌히 응해줄 정도면 고객님도 복이 많다는 증거기도 하다


냉장고가 빠져나간 자리에 철제 선반이 들어왔다

그 자리에 향초 재료들을 수납했다

그리고 딸이 쓰던 책장에 있던 용품들은 모두 모아 다른 곳으로 보내고 그 자리에 고양이 용품을 채웠다

마지막으로 거실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식탁을 이 방으로 가져와 작업 테이블로 뒀다

덕분에 거실을 좀 더 넓게 쓸 수 있게 됐다

그 사이 거실 겸 주방도 군더더기 없이 마무리 됐다

동기선생님이나 나나 봉사활동으로 정리 기본기를 다졌기 때문에 이 정도 난이도는 그리 어렵지 않다

고객님은 나에게 정리 마법사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진심으로 나와 동기 선생님께 고마워했다

전날 우리에게 줄려고 직접 만들었다며 수제 비누와 생강차도 바리바리 싸줬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큰 기쁨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참 기분 좋았다

그 당시 일에 대한 자존감이 살짝 떨어져 있던 시기였는데 그날만큼은 내가 최고 일인자가 된 것만 같았다

그날 받아온 비누는 한 동안 쓰지 않고 내 화장대 위에 기념품처럼 고이 올려뒀다

근데 비누가 취미로 만든 것치곤 퀄리티가 좋은 편이

물어보니 자격증도 있고 사업자도 있다고 했다

저 재능을 그냥 썩히기가 아깝단 생각에 고객님께 동의를 얻어 어느 강사 카페에 고객님 이력을 올렸다


그러던 중 어느 문화센터에서  급하게 비누 공예 강사님이 필요하단 연락이 왔다

부랴부랴 고객님께 연락해서 거기 면접 볼 수 있게 다리를 놨

얘기가 잘 돼서 일이 진행되던 중에 코로나로 폐강이 됐다 결국 강의는 하지 못했지만 그날 일을 계기로 고객님도 향초 공예 자격증을 더 보강할 거라고 하셨다

아무래도 발달장애 아들을 키우다 보니 시간적인 면에서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있어 프리랜서 강사직을 권해 드렸던 건데 고객님도 나와 마음이 통한 거 같다

그동안은 집안 환경도 어수선하고 생활고로 인한 우울증도 있었는데 정리하고 나서 좀 더 밝아진 고객님을 보니 나도 내심 뿌듯했다

고객님 종교가 기독교였는데 당시 하나님이 보내준 사람이라고 나를 극찬해 주셨다

그 후로도 가끔 고객님과 서로의 안부를 묻곤 했는데 최근 지방으로 이사를 간다고 하셨다


단 한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던 컨설팅은 없지만 내가 정리 전문가가 된 이레 가장 뿌듯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이 날의 컨설팅 당당히 후보에 올릴 수 있다

나는 누군가에 마법 같은 하루를 선물해 준 정리의 마법사다.

그 자부심이 나를 힘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전 02화 함박눈이 오면 생각나는 사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