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ilbreak
"You don't have to be great to start, but you have to start to be great." (Zig Ziglar)
분위기는 일순간에 얼어붙었고, 갑자기 적막이 흘렀다.
글로비스에서 3년이라는 나만의 가상임기를 정하고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우선순위를 정하기 위해서 신사업 Funnel을 만들었다.
신사업 Funnel은 신사업 진행 단계를 4단계로 구분하여 각 단계를 정의하고
그 정의에 맞게 현재 진행 중인 신사업 아이템들을 Mapping 한 것이다.
1단계는 아이디어 발산 단계, 2단계는 PoC를 통한 검증 및 사업 전략 구체화 단계,
3단계는 투자/사업심의 단계, 4단계는 심의 통과 후 사업준비/추진 단계로 나눴다.
우리 본부에서 추진해 보겠다고 한 70여 개의 아이템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나열했다.
그리고 각각을 구체화 단계에 맞춰 Funnel에 Mapping을 해보았는데
대부분이 1단계였고, 2단계도 몇 개 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3단계에 찍힌 아이템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태국 사업이었다.
태국 사업은 내가 Join 하기 전부터 오랫동안 공들여 온 아이템이었다.
나는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절 글로비스에 처음 왔는데 부서에 몇몇 사람들이 안보였다.
글로벌사업개발을 하던 친구들이었는데
그 코로나 시국에 그 친구들은 태국에 몇 달씩 돌아가며 계속 출장을 나갔다.
방콕 공항에 내리자마자 병원으로 직행하여 PCR 검사를 받은 후 2주간 호텔방에서 격리했고
격리가 풀린 후부터는 몇 달간 태국에 머물며 고객과 파트너들을 만나 협상을 했다.
그리고 최대 체류기간이 만기 되어 한국에 돌아오면 다른 멤버가 또 나가서 똑같이 했다.
본인들 건강도 생각하지 않고
몇 달간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는 수고를 감내하면서 정말 공격적으로 일했다.
기가 막혔다.
그 결과 태국의 재계 순위 1위 기업인 CP그룹과 Network을 만들 수 있었고
CP의 회장, 부회장 등 Top Management와도 소통할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
글로비스 입장에서는 고생 끝에 찾아온 기적같은 기회였다.
LG에서 Open Innovation 담당으로서 수많은 글로벌 회사들과 파트너십 논의를 해오면서
이 정도까지 양사의 관계를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오래 걸리고 힘든지 잘 알고 있었기에
우리 실무진 친구들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문득 궁금해졌다.
'아니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태국사업은 왜 진척이 없는 걸까?'
태국사업을 담당하는 글로벌사업개발실장을 불러서 물어보았다.
“실장님, 태국 사업 현재 상태가 어떤가요? 왜 진행이 이렇게 더디지요?”
“그게 지금 재경 쪽에서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태국 현지에 사업 주체를 만들어야 뭐라도 시작이 될 텐데
Risk가 크다고 계속 반대를 하고 있어서 심의 통과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업을 시작하려면 무조건 그쪽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건가요?
우리 본부장님이 오케이 하셔도요?”
“네. 원래 유관부서의 협조가 없으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못 나갑니다.”
“잘 이해는 안 가지만... 일단 알겠습니다.”
고민을 했다.
문제를 단순화시켜 봤다.
문제를 푸는데 누가 핵심인가? CFO다.
지금 누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인가? 전사 기획실장이다.
이 분은 전사 전략의 키맨으로
직급으로나, 성향으로나, 역할로나 내가 반드시 도움을 받아야 하는 분이었다.
글로벌사업개발실장을 다시 불러서 말했다.
“실장님, 나랑 함께 좀 갑시다.”
함께 28층 기획실장님 자리로 올라갔다.
“어 박상무님, 어쩐 일로 여기까지 다 오시고...”
“네 상무님. 급히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요.”
“부탁? 저한테요?”
“저희 태국 사업 건 말인데요…”
“아 그거? 왜? 뭐가 잘 안 돼요?”
“상무님, 아니 형님. 저 좀 도와주세요. 저 너무 힘들어요.”
“엥? 왜 또 갑자기... 뭐가 그렇게 힘드세요? ㅎㅎㅎ”
“이게 지금 재경 쪽 협조부서에 꽉 막혀 있어서 몇 달간 그냥 멈춰 있다고 하는데
이러면 진행이 안되잖아요. 저 좀 도와주세요. 진짜 너무 힘드네요.”
“아 그래요? 신사업이 원래 쉽지 않죠..."
“그거야 제가 더 잘 알지요.
쉬워서 해보자는 게 아니라 의미가 있으니까 어려워도 어떻게든 되게 만들어 보자는 거예요.
그러니까 형님이 좀 도와주세요. 전 여기 도와주실 분이 형님 밖에 없어요. 아시잖아요...”
“일단 알겠어요. 너무 낙심하지 마시고...”
“도저희 안 되겠어서 부탁드리는 거니 형님만 믿을게요. 정말 고맙습니다.”
“네 그래요. 무슨 말인지 잘 알겠어요.”
이쯤 되면 상황과 내 의견은 분명히 전달이 된 것 같았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재경 쪽 실장들과 태국사업 심의 전 사전 논의자리가 있었는데
실제로 기획실장님이 재경 쪽 실장들을 강하게 설득해 주셨다고 전해 들었다.
너무 감사했다.
그다음 날, CFO 방에 혼자 올라갔다.
“부사장님, 안녕하세요?”
“오, 박상무, 어쩐 일로 제 방에까지 다 오시고...”
“부사장님께 말씀드릴 게 좀 있어서요.”
“뭔데요?”
“부사장님, 저희 쪽에서 준비 중인 태국 사업 있잖아요.”
“아... 태국 건? 그거 난 반대야. 내가 좀 들어 봤는데...
사업도 아직 불분명하고 현지에 3자 합작 법인을 만든다는 게 그렇게 말처럼 쉽지 않아요.
나중에 문제가 엄청 많을 거라고...”
“부사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도 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저 너무 힘들어요. 좀 도와주십시오 부사장님.”
“ㅎㅎㅎ 갑자기 그렇게...
미안한데 이게 박상무가 힘들다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부사장님, 저 신사업하라고 해서 왔는데 와 보니 정말 할만한 사업이 하나도 없어요.
대부분 다 아이디어 수준이고... 그나마 이 태국 건이 제일 진도가 많이 나가 있는 거예요.
물론 부사장님 말씀대로 아직은 해결해야 할 이슈들이 많은 것은 맞는데요.
그래서 하지 말라고 하면 저 진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부사장님 말씀하신 이슈들을 해결해 가면서
어떻게든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저희가 매니지를 잘해보겠습니다.
도와주세요 부사장님. 부탁드립니다."
“아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잘 못 하면 괜히 문제만 더 커진다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부사장님. 그래도 한 번만 믿고 좀 도와주세요.”
“일단 알겠어요. 아무튼 상황을 좀 봅시다.”
“네 감사합니다 부사장님.”
현재 상황과 내 의견, 감정은 충분히 전달드렸고
계속 매달리는 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어서 일단 후퇴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부사장님 방에 다시 올라갔다.
“부사장님, 안녕하세요?”
“아 박상무, 또 왔어? 그 태국 건 그거 쉽지 않데두... 난 여전히 반대예요.
박상무도 잘 좀 다시 생각해 봐. 합작 법인이라는 게 이게 정말 쉽지 않아.
좋을 때야 괜찮지만 사업이 조금만 안 좋아져도 서로 싸우고 아주 골치 아프다고...”
“부사장님,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너무 힘들어서 그래요.
우리도 뭔가 미래준비를 하긴 해야 하는데 당장 할 수 있는 게 태국 사업밖에 없어요.
신사업하는데 이 정도 불확실성도 없는 건 하나도 없잖아요.
어떻게든 부사장님 말씀하시는 Risk는 잘 매니지를 해보겠습니다. 도와주세요."
“아참 끈질기네 박상무.
아무튼 내일 사장님 모시고 다들 모여서 사업심의를 따로 하기로 했다고 하니까
그때 상황을 좀 봅시다. 어떻게 이야기가 될지...”
“네 알겠습니다 부사장님. 말씀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논리적으로 설득될 상황이 아니었다.
그럴 땐 그냥 솔직하게 도움을 청하는 게 좋다.
너무 힘들다고 하고... 좀 도와달라고 하고... 잘 부탁한다고 하고...
당장은 못 도와줄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뭐라도 도와줘야지 하는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진전이다.
일단 심의 전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사업심의회' 당일이 되었다.
회의실은 대학 강의실처럼 계단식으로 되어 회의 참석자들이 발표자를 내려다보는 구조였다.
사장님이 가운데 앉으시고 CFO 부사장님이 그 왼편에 앉으셨다.
다른 유관부서의 임원들과 팀장들도 삼삼오오 나누어 앉았다.
도합 서른 명 가까이 되는 인원들이 모여 다소 굳은 표정으로 회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묘한 긴장감이 회의실에 흘렀다.
나와 글로벌사업개발실장은 앞에 앉아 회의 참석자들을 마주하고 발표를 시작했다.
한참을 발표했을 때 CFO께서 우려했던 대로 반대 의견을 내기 시작하셨다.
실제 이렇게 진행을 하게 되었을 때 우려되는 점들을 하나씩 조근조근 말씀을 하셨다.
사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CFO께 두 번이나 사전에 올라가서 부탁을 드리면서
부사장님이 반대하시는 이유, 걱정하시는 포인트들에 대해서 이미 충분히 파악을 했고
그것들에 대한 나름의 합리적인 대답을 조목조목 준비를 해서 적어 왔기 때문에
나름 예상했던 시나리오대로 회의가 흘러가는 셈이었다.
그런데 그때,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사장님이 갑자기 언성을 높이기 시작하신 것이다.
“아니, 김부사장은 이런 신사업 회의 할 때마다 맨날 똑같은 소리만 하노?
이건 이래서 안 된다, 저건 저래서 위험하다 매일 반대만 하고
도대체 그럼 어쩌자는 거냐?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거냐? 에이 참 내 답답해서...”
분위기는 일순간에 얼어붙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인자인 CFO께서 까마득한 후배들 앞에서 사장님께 핀잔을 들었으니
그 앞에서 구구절절 변명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분위기 바꾼다고 다른 의견을 내기도 애매한 상황이고.
회의실에는 한동안 적막이 흘렀다.
어떻게든 누군가가 이 분위기를 깨야만 했다.
발표자인 내가 해야 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말문을 열었다.
“사장님, 신사업에 힘을 실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지만 사장님, 감히 한 말씀드리자면...
사실 방금 CFO가 말한 것들은 하나도 틀린 말이 없습니다.
정말 한마디 한마디가 주옥같은 말들이고
사업을 하는 저희 같은 사람들이 미리 따져보고 준비해야 할 Risk 맞습니다.
오늘 회의 전 제가 CFO를 몇 번 찾아뵙고 그 Risk들을 사전에 파악했고요.
하나도 빠짐없이 List로 만들어서 대응 방법을 이미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는 사업하는 저희들이 챙겨야 하는 건데 아직 저희 본부가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재경 쪽에서 전문성을 가지고 도움을 주신 거라고 생각하고 있고
부사장님도 CFO로서의 역할을 잘해주셔서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까 사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신사업은 원래 태생적으로 Risk가 있을 수밖에 없는 거니까
'미리 잘 따져보고 대비하면서 한번 잘 만들어 봐라'라고 말씀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Risk가 많으니 하지 마라'라고 하시면 할 수 있는 신사업은 하나도 없을 거예요.
걱정하시지 않게 저희가 잘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사장님.”
사장님은 별말씀이 없으셨다.
부사장님도 무표정으로 아래를 쳐다보시며 고개만 끄덕이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의는 그렇게 끝이 났다.
Go/No-Go 명확한 의사결정은 없었고
이것저것 추가 검증을 해보자는 말씀은 있었지만
마무리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았다.
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와서
글로벌사업개발실장과 담당 팀장을 불러서 이야기했다.
“그동안 수고 했습니다. 이제 법인을 만들면 되겠네요. 시작합시다.”
그렇게 시작한 지 4개월 만에 태국에 글로비스 최초의 3PL 법인이 만들어졌고
그다음 달에 태국 현지에서 법인 설립 행사를 성대하게 진행했다.
사장님을 모시고 나가서 CP그룹의 Top들과 만나 MOU 세리모니도 했다.
신사업 Funnel을 정리하고 처음으로 만들어 낸 신사업의 작은 진전이었다.
겨우 첫걸음을 내디뎠을 뿐이지만 소중한 경험이었다.
내게도. 팀에게도.
살다 보면 이런 때가 온다.
가야 할 길이 바쁘지만 앞 길이 꽉 막혀 있을 때.
그래서 한 걸음도 앞으로 떼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마음은 급한데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을 때.
그때 그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디로든 첫걸음을 떼는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아 불안하더라도 어떻게든 한 걸음을 떼고 나면 또 새로운 게 보인다.
그러면 또 한 걸음.
그렇게 조금씩 앞으로 가는 거다.
어떻게든 그 첫걸음을 떼야한다.
시작이 반이다.
오래전 레이크사이드CC에서 새벽 골프 라운딩을 한 적이 있었다.
그날따라 새벽안개가 매우 심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서 마치 구름 속에서 걷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 멀리서 빨간 불 하나가 반짝였고, 캐디분이 말했다.
"저기 빨간 불 보이시지요? 그쪽으로 치시면 됩니다. 그냥 믿고 치세요."
보이지 않았지만 그냥 드라이버를 휘둘렀다.
그리고 걸어 나갔다.
걸어 나가면서 보니 신기하게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아, 여기에 벙커가 있구나. 어, 저쪽은 해저드가 있었네...
그 홀이 어떻게 생겼는지 파악하는 데 필요한 것은 드라이버 한 타였다.
용기내어 한 타를 투자해야 비로소 보인다.
그날 이후 난
무언가를 하다가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 모를 때
그래서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땐
그날의 그 안갯속 라운딩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