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ilbreak
"Sometimes you have to do what you don't like to get to where you want to be." (Tori Amos)
뉴저지 한식당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싸인이라도 받아 놓을 걸 그랬다.
2024년 3월 메이저리그 월드투어 서울 시리즈가 고척 스카이돔에서 열렸다.
LA 다저스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경기였는데 박찬호가 나와서 시구를 했다.
그는 시구가 끝나고 샌디에이고의 투수 다르빗슈 선수를 응원하며 말했다.
"내가 가진 기록도 언젠가는 깨져야 합니다. 다르빗슈 선수가 꼭 해내기를 바랍니다."
대인배 같은 멘트였다.
그때 알았다. 그의 기록이 아직 깨지지 않았음을...
124승.
메이저리그 아시안 투수 최다승 기록은 박찬호가 가지고 있다.
날고 긴다던 일본과 한국 투수들이 수 없이 메이저리그를 다녀 갔는데도
거의 15년 가까이 그 기록이 깨지지 않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한 기록이다.
그는 1994년 LA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몇 년 후 두 자리 승수를 기록하며 다저스의 에이스로 발돋움하더니
2000년 한 시즌 개인 최다인 18승을 올리며 메이저리그 전체의 특급 투수가 되었다.
하지만 텍사스로 이동 후 부상이 겹치며 전성기가 끝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메이저리그 역사 상 최고의 먹튀라는 불명예가 연일 미디어에 보도되었다.
2007년엔 마이너리그로 강등되며 선수생활의 끝이 보이는 듯했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온 국민이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았어요."
화려한 메이저리그 최고 명문구단에서 특급 대우를 받았던 그였기에
박수도, 응원도 없는 마이너리그의 어두운 락커룸에서 움츠려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당시 승수는 113승. 노모 히데오의 123승 기록까지 단 10경기 차이였다.
그는 말했다.
"기록은 중요합니다. 마이너리그로 강등되었을 땐 이제 정말 끝인가... 생각도 들었어요.
하지만 그때 노모 히데오 선수를 보면서 다시 한번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노모 선수의 기록은 내가 다시 일어서야 하는 이유가 되었어요.
어떻게든 그건 깨보고 싶었습니다."
선발투수라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셋업맨으로 변신했다.
매년 필라델피아, 뉴욕, 피츠버그 등의 구단을 계속 옮겨 다니면서도 꿈을 놓지 않았다.
이제 그만하라는 주위의 만류에도 그는 끝까지 스스로를 믿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기회를 주었다.
"하루만 살자. 한 번만 더 던져보자."
결국 셋업맨 3년 만에 11승을 추가할 수 있었고, 124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뭉클했다.
화려했던 왕년을 그리워하지 않고 바닥에서 그 시간들을 버티고 이겨낸 그가 한 인간으로서 존경스러웠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알았을 텐데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을까?
남들이 다 끝났다고 했을 때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건
그 꿈을 반드시 이루고 싶다는 열정 때문만이 아니라
조금만 더 하면 해낼 수 있다는 희망 덕분이 아니었을까.
세상에는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저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실제로 그걸 하면서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 사람들은 '해야 하는 일'로 하루를 채우며 살아간다.
이유는 간단하다.
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령,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라면 돈 버는 일을 해야 한다.
원치 않는 일이라도 자기를 받아주는 회사에 취직해 일을 하거나
운전면허가 있다면 택배나 대리기사를 할 수도 있다.
생활비를 벌 수 있다면 그게 뭐든 그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는 '하고 싶은 일'을 희생하면서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은 꿈에 관한 일이다.
'해야 하는 일'은 사회적 책무에 관한 일이다.
둘 다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건 '할 수 있는 일'이다.
꿈 때문이든 책임감 때문이든
결국 우리 모두는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일생을 보내기 때문이다.
세상에 꿈을 꾸는 사람은 많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당장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할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꿈을 '할 수 있는 일'로 만들 수 있는지에 집중해야 한다.
할 수 있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그 실력을 발휘하여 꿈에 이르는 길을 또렷이 만들어야 한다.
아무리 원해도 실력이 안되면 할 수 없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꿈을 이루는 길이 불분명하면 끝까지 버틸 수 없다.
노래와 춤으로 세계 최고가 되고 싶다면 방구석에서 연습만 해서는 안된다.
어떻게 인정받을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하고 두드려야 한다.
유튜브가 됐든, 오디션이 됐든, 엔터회사의 연습생이 됐든 될 수 있는 길을 개척해야 한다.
그 길이 또렷해질수록 끝까지 해낼 수 있다.
축구로 세계 최고가 되고 싶다면 운동장에서 공만 찬다고 되진 않는다.
어떻게 세계 최고의 리그에 갈 수 있는지,
그러려면 어떻게 스카우터의 눈에 띌 수 있는지 방법을 찾고
그 궁극적인 방법에 한 발짝씩 가까이 나아가고 있어야 버틸 수 있다.
스타트업이 세계 최고의 기업을 만들기 위해 기술만 개발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 기술을 고객에게 어떻게 알리고 팔 수 있을지,
그때 어떻게 돈이 들어오게 되는지 비즈니스 모델을 명확히 해야 한다.
그래야 기술 개발을 끝까지 완성해 낼 수 있다.
꿈에 이르는 길이 명확해야 한다. 끝이 눈에 보여야 한다.
그래야 '할 수 있는 일'이 된다.
박찬호가 이루어 낸 124승 기록이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는 그럴만한 실력을 갖추었고
조금만 더 하면 꿈을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은 113승의 고지에 이미 올랐기에 버틸 수 있었다.
124승까지의 길이 보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의 승수가 113승이 아니라 83승이나 93승이었다면
다르빗슈가 깨야할 기록은 박찬호가 아니라 노모 히데오의 기록이었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일'로 만들어야 한다.
꿈에 이르는 길을 또렷이 만들어야 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사람들은 힘을 낸다.
정말 해낼 수 있을 것 같을 때 사람들은 끝까지 버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