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렸지만 잃어버리지는 않을
과거 대학의 교수로서 발 빠른 미디어 적응력을 보여주던 ‘X세대’의 엄마를 둔 ‘나’는 발전하는 디지털 미디어 산업 기술에 밀려 구석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특수 분장 팀의 일원이다. 이제는 여든일곱 살이 넘어 요양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엄마’는 점차 ‘나’를 알아보지 못하게 되고, 개화하는 꽃과 시들어가는 꽃의 모양새를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몸을 일으켜 강단에 서기는커녕 늙은 몸을 지탱시킬 나뭇가지 하나 주워 올 기력조차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들어 가는 엄마의 곁을 서성이는 ‘나’ 역시 별 다를 바는 없다. 인지 장애로 인해 과거의 반짝임을 잃어가는 ‘엄마’와 유사하게도, 기계만 있다면 그래픽 기술을 통해 그 어떤 생명도, 물질도 창조해 낼 수 있는 시대 속에서 ‘나’는 살인적인 노동 환경을 악으로 버텨내며 겨우 자리에 서 있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이다.
암울한 디스토피아 세계라고 해서, 엄마와 딸 사이 관계도 우울해지는 것은 아니다. 기억과 함께 애정도, 시간도 모두 잊어버린 엄마의 입에서 나온 ‘니니코라치우푼타’. ‘나’는 엄마의 어릴 적 친구라는 그 외계인을 구현해 내기 위해 분장 팀 선배에게 부탁까지 해 가며 그의 머리통을 덮은 ‘니니코라치우푼타’를 구현해 낸다. 하지만 허무하게도. 모든 것을 회복한 것처럼 옛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쏟아내던 엄마는 분장한 선배를 바라보며 겁을 집어먹을 뿐, 여전히 과거를 잊은 그대로다.
그럼에도, 잊고 지워졌다고 해서 사랑했던 그 순간과 시절들이 영영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엄마의 유품에서 띄엄띄엄 엉망으로 쓰인 ‘영화 신청 목록’ 쪽지를 발견한 ‘나’는 ‘니니코라치우푼타’라는 존재가 탄생하게 된 연유를 깨닫는다. C급에 가까운 B영화, 공급 계약마저 종료되어 방대한 인터넷 세상을 뒤져도 찾을 수가 없는 영화. 종이쪽지 속 그 수많은 영화 30여 편은 모두 ‘나’의 분장 팀이 작업에 참여한 작품들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하며 우리 사무실 바깥에서는, 즉 이 세상에서는 나의 엄마만이 알고 있는, 이제는 알고 있었던” 그 영화들은 ‘나’에 대한 엄마의 사랑이자, ‘니니코라치우푼타’의 탄생 근거였던 것이다.
‘니니코라치우푼타’에 대해 구병모는 “누구도 그 이름을 알지 못하며 어떤 국가의 글자로도 쓸 수 없으나 태초의 우주 어디에선가 내려와 지금 이 자리에 실존하는 말. 세상 어느 민족에게서도 발견되지 않은 기원적 끝자락에서 왔을지도 모르는 이름”이라 말한다. 책을 접한 나에게는 이 단어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발음되는지 더 이상 크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무엇인가가 떠오름과 동시에 무엇인가가 쿵, 내려앉게 되는 그런 마음.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저 엉뚱한 단어를 보며 나는 정체 모를 어떠한 것에 반응하는 가슴을 느끼고, 울컥하고 그리움이 올라오는 버겁고도 아련한 경험을 했으니.
잊혀가는 기억이 늘어나는 우리의 근 미래는 과연 암울하기만 할까. 애틋하고도 그리운, 잊어버렸지만 잃어버리지는 않을 우리 인간의 인간성을 말하는 구병모의 「니니코라치우푼타」는 다가올 미래가 그리 비극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비약을 행하게 만든다. ‘니니코라치우푼타’라는 엉터리의, 미지의 언어로만 남아버린 그것. 과거와 인지를 잃어가는 와중에도, 딸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와중에도 종이쪽지에 그 수많은 영화를 적어낼 수 있게 만들어준 그것. 희미하지만 선명한, 무겁지만 가벼이 끌어안을 수 있는 추상적이고도 모호한 그것은 우리의 언어로 표현하기엔 다소 버겁게 느껴진다. 이제는 바라볼 수 없는 엄마의 흔적이 남은 쪽지와 외계인 마스크를 통해 우리는 ‘모성’이라는 무난한 단어로는 결코 정의 내릴 수 없는 그것을 몸소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구병모 『니니코라치우푼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