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단상] 존 르 카레,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 장벽 위에 남은 회색빛 숨결

by 백조히프 김재민

⏹ 글 속에 들어가며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는 내가 30대 시절에 만난 존 르 카레의 첫 첩보소설이다. 리차드 버튼이 주연한 동명 영화를 두번이나 먼저 보고 이 작품을 접했을 때 그 문체의 담담한 서늘함에 바로 빠져 들었다.


이야기는 베를린 장벽 근처의 검문소에서 시작된다. 영국 정보부 요원 알렉 리머스는 자신의 부하가 동독으로 탈출하다가 사살되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 장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냉전의 잔혹한 현실을 압축한 서막이다. 총성과 함께 무너지는 것은 한 요원의 생명만이 아니라, 리머스가 구축해 온 정보망 전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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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웅이 아닌 첩보원 사내


런던으로 소환된 그는 상관 컨트롤로부터 마지막 임무를 부여받는다. 동독 정보부의 핵심 인물 문트를 제거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전은 통상의 암살이나 납치가 아니다. 리머스는 몰락한 요원처럼 위장하여 적의 품으로 스며들어야 한다. 그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연극을 시작한다. 술에 취하고, 직업을 전전하며, 감옥에까지 들어간다.


알렉 리머스는 제임스 본드와 같은 인물이 아니다. 그는 지쳐 있고, 냉소적이며, 자신의 직업에 환멸을 느끼는 사내이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다는 고상한 수사는 이 소설 안에서 거의 무의미하다. 정보부의 상관 컨트롤은 감정 없는 체스 선수처럼 말을 움직인다. 그리고 리머스는 그 말 중 하나에 불과하다.


내게는 이 설정이 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조직은 언제나 목적을 향해 합리적으로 움직이지만, 그 합리성의 끝에는 인간의 얼굴이 지워져 있다. 르 카레는 그 지워진 자리를 응시하며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다.


⏹ 사랑과 기만 사이


파괴된 자신을 연기하는 리머스가 도서관에서 만난 리즈 골드는 이 소설의 윤리적 중심축이다. 그녀는 이상주의적 공산당원으로 체제의 논리를 순수하게 믿는 인물이다. 리머스는 그녀에게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사랑에 빠진다.


리머스는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진짜 얼굴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 침묵이 이 소설을 더욱 아프게 한다. 사랑은 고백을 전제로 하지만, 첩보의 세계에서는 고백이 곧 파멸이기 때문이다.


리머스는 점점 더 깊은 위장 속으로 들어간다. 동독 측과 접선하고, 문트가 영국의 이중 스파이라는 암시를 흘리며 정교한 음모를 꾸민다. 조작된 재정 자료, 계산된 증언, 설계된 배신.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


⏹ 반전과 반전의 끝, '환멸'


동독에서 열린 비밀 재판은 극적 절정이다. 피들러는 리머스의 증언을 무기로 문트를 몰아붙인다. 그러나 목표를 이룬다고 여긴 결정적인 순간, 리즈가 증인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무심코 진실을 말한다. 영국 정보부가 리머스의 생활비를 지원했다는 사실. 그 한마디는 모든 작전을 뒤집는다.


여기서 밝혀지는 진실은 냉혹하다. 영국 정보부의 목적은 문트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호하는 것이었다. 리머스는 거대한 전략의 소모품에 불과했다. 그는 작전의 주역인줄 알았던 자신마저도 역전 승리를 위한 기만의 도구로 전락한 것에 커다란 배신감과 환멸을 느낀다..


⏹ 체제의 승리, 인간의 패배


결국 영국 정보부의 이중간첩 문트는 살아남고, 그를 제치려던 피들러가 역공작에 걸려 제거된다. 문트의 도움으로 리머스와 리즈에게는 서베를린으로 탈출할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함정이다. 장벽을 넘는 순간 총성이 울리고, 리즈가 먼저 쓰러진다.


리즈의 일회용 쓸모는 소멸되고 작전 발설의 위험만 남았기 때문이다. 쓸모가 남은 리머스는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장벽을 넘어가다말고 죽어가는 리즈 곁으로 되돌아간다. 이 선택은 첩보원의 논리가 아니라 인간의 논리이다. 그는 결국 총에 맞아 쓰러진다.


이 선택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다. 르 카레는 이를 장엄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덤덤하다. 그 덤덤함 속에서 나는 한 인간의 마지막 자존을 본다. 체제의 계산을 거부하는, 사람다운 존엄을 지키려는 완강한 저항을 말이다.


⏹ 맺음말-백조히프(김재민)


전직 정보원 출신인 르 카레의 문체는 감정을 과잉 투입하지 않는다. 문장은 짧고, 대화는 건조하다. 그러나 그 절제 속에서 독자는 더 깊이 빠져든다. 마치 얼어붙은 강 위를 걷는 듯한 긴장감이 끝까지 이어진다.


나는 이 작품을 읽을 때마다 화려한 서사보다 절제된 문장이 더 오래 남는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다. 이 소설은 첩보의 세계를 다루지만, 결국은 인간의 고독과 선택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고독은 시대를 넘어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영화 속 리처드 버튼이 연기한 리머스의 얼굴이 떠오른다. 흑백 화면 속 그의 표정에는 과장된 비장미가 없다. 다만 지친 눈빛과 무거운 침묵이 있을 뿐이다. 그 기괴한 스파이 세계에서 강요된 침묵이야말로 이 작품의 진짜 언어라 할 수 있다.


내가 2007년 12월 순안공항에서 버스로 들어가다 회색조의 평양거리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이상한 엘리스의 나라' 같던 기괴한 분위기 속에 빨려 들어가며 제일 먼저 이 소설명이 떠올랐다. 그만큼 이 소설의 '회색지대' 이미지는 강렬하다.


◆ 작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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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히프(김재민), 독일 경영학 박사, 전 경성대학교 교수


‘인문학의 시선으로 세상을 읽는 글’을 쓰며,

경제 경영·문학·역사·철학·예술교양을 넘나드는 사유의 지평을 탐구합니다.

현재 브런치에서 《국내외 명작 단상 시리즈》를 연재 중이며,

크몽에서는 『러시아 문학』, 『독일 문학』, 『프랑스 문학』,『영미 문학』, 『한국 문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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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인간의 내면을 통해 시대를 읽고, 시대를 통해 인간을 해석한다는 신념으로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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