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장발, 베이시스트.
오늘은 스페인에서 만난
(일방적 만남. 일방적 기억일 테지만…)
장발의 할아버지 베이시스트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나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 열아홉이고 작년 겨울, 오랫동안 모은 돈으로 중학생일 때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스페인에 다녀왔다.
'자퇴생과 에스파냐' 에서 푸는 모든 이야기는,
작년 11월 2일부터 12월 1일까지 스페인의
마드리드와 세비야로 어학연수에 간 동안 일어난
일에 관한 것들이다.
난 모처럼 학원에 가지 않고 하루를 풀로 즐길 수 있는 주말에, 미리 예약 해놓은 강 크루즈를 타러 강을 따라 거리를 걷고 있었다.
걷다 보면 공원도 나오고 작은 광장처럼 트여 있는 공간이 나온다.
크루즈 약속 장소까진 직진해서 600m 가량 더 걸어야 하고 약속 시간까지는 1시간 가량의 여유가 있었다.
앞으로 저벅 저벅 걷고 있는데 저 멀리 어디선가 베이스 소리 (처음엔 기타 소리인 줄 알았다.)와 함께 파워풀한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겠는가? 버스킹 임에 틀림 없었다.
참고로 나는 버스킹에 환장한다. 대도시에 살질
않으니까 여행 가지 않으면 버스킹을 볼 일이 없다.
우연히 여행 중에 버스킹을 만나면 뭔가에 당첨된
것처럼 기분이 좋다.
그 날은 83%의 확률로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 날이 된다.
버스킹을 하는 자가 매끄럽게 완성된 솜씨가 아녀도 상관없다. 일상에서 두루두루 볼 수 있는 노래 솜씨일 지라도 난 격하게 감동하고 눈물을 글썽인다.
사실 길거리에서 뭔가 한다는 사실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다.
길거리에서 노래 부르고 춤 추고 기타를 치는 게 보편화되어 있지 않은 시대에 버스킹을 하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볼 걸 알면서 한다는 게 대단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걸 할 자신이 너무 없기 때문에 남들이 해주면 너무 감사하다.
기쁜 맘으로 정진하다보니 어느새 버스킹 하는 자의 형상이 뚜렷해졌다.
머리가 반 정도 허옇게 물든 장발의 할아버지였다.
그는 머리를 들썩이거나 두 발을 까딱이며 신명나게 베이스를 치고 있었다.
동시에 노래도 함께 불렀는데 오아시스나 예를 들면 오아시스가 연상되는 창법이었다.
그날 유독 햇볕이 쨍쨍하고 스무 명 가량 되는 사람들이 의자나, 바닥, 계단에 앉아 이미 즐기고 있었다.
연주자 주변을 빙 둘러 모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듣고 있지 않는 것도 아니고
반경 7m 내에 각자 할 일 하면서 자신이 앉고 싶은 곳 아무데나 앉아 있었다.
나는 잠시 멈춰서 보다가 다시 길을 떠나려다 (버스킹에 환장한다고 말해놓고 앞뒤가 안 맞는다.)
다시 돌아와서 다른 사람들처럼 계단에 걸터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베이시스트가 “Everybody wants to rule the world”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였다.
슈퍼밴드에서 포코아포코 팀이 연주한 버전으로 수십 번 들은 노래여서 속으로 감격했다.
그날 아침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유난히 여유로웠다. 햇빛 맞으며 조용히 감상하다
한 곡이 끝나면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내길
연달았다. 어떤 사람들은 지나가면서 큰 소리로 "유어 쏘 쿨!!"을 외치고, 춤을 추었다.
나도 목소리를 크게 내어서 당신 정말 죽인다고, 최고라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최대한 열심히 손의 바닥과 바닥을 부딪히는 것으로 대신 했지만 그걸로는
만족되지 않았다.
남을 꾸짖는 것도 아니고
칭송하고 응원하는 마음도 마음 놓고 전할 수가
다니.
칭송과 응원이 참으로 어색한 스스로가 참으로
통탄스럽게 느껴졌다.
살짝 속상한 채로 듣다가 크루즈로 갈 시간이 되었을 즈음 지갑을 열었다.
에너지 있는 환호가 어려우니 다른 방식으로라도 연주에 대한 리뷰를 작성하고 싶었다.
하필 그때 동전이 거의 다 떨어지고 지폐도 없어서, 1유로 동전을 싹 다 모아 손에 쥐고 연주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벌써부터 조금 긴장했다.
연주가 끝나고 베이시스트는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나도 주섬주섬 다가가 기타 케이스 안에 동전을 넣고, 베이시스트가 다른 사람들과 하는 대화가 끝날 때까지 뻘쭘하게 기다렸다.
대화가 끝나자마자,
"정말 멋져요, 당신 이름 좀 알려줄 수 있어요?"
하고 물었다.
그러나 베이시스트는 스페인어를 잘 못하는 것 같았다.
아차.
여기가 스페인이라고 이 사람까지 스페인일리는 없잖아?
아차.
내가 어버버하며 설명하자 베이시스트는 알아 들었는지 휴대폰을 켜서 유튜브에 들어갔다.
검색창에 "lomanis bass" 라고 치자
십 오년 전, 칠년 전
수년 전의 그를 찍은 영상들이 쫘라락 펼쳐졌다.
영상 속의 그는 지금과 거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지금처럼 전 세계 어딘가에 앉아서 머리를 흔들고, 발로 리듬을 타며 연주와 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 유튜브 이름을 잡서장에 적어 놓았다.
진짜 멋진 사람을 봤다고도 적었다.
하루가 그런 식으로 시작되어서인가.
그날 하루가 계속 영화처럼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