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좋은 고딩

by 해고

한국에 온지 거의 4개월이 지났는데도 며칠에

한 번씩은 스페인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이상하게 마드리드는 잘 모르겠고 세비야만 떠오른다. 왤까,

최근 그 이유가 물의 유무에 있었다는 걸 알아냈다.


부모님에게 마드리드가 서울이면 세비야는 부산이라고 설명했었다. 그리고 난

부산을 더 좋아한다…


쉐어하우스에서 오 분만 걸으면 강과 산책로가 있었다.

나는 평생 논과 산이 즐비한 곳에 살아 물만 보면 흥분하는 고등학생이다. (수영도 못 하면서)


쨌든 그 차이였던 것 같다.

세비야의 자연환경이

느좋 마드리드의 고풍스러운 건물 양식,

세련된 도시 감성,

커다란 광장과 잘 갖춰진 인프라를 이겨버렸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눈 앞에 제일 먼저 보이는 게 뭐냐, 물이 있냐 없냐.



세비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햇볕에 타오르는 세비야 강의 잔상,

흠집없이 시퍼런 하늘이다.

홈스테이 쉐어하우스가 세비야 중심가에 있어서 대중교통은 한 번도 이용하지 않고 오로지 도보로 모든 관광지를 돌았다.


아침에 기분 나쁘게 일어나서 대충 씻고 바로 어학원으로 향했다.

도착 시간은 언제나 간당간당했다.

어학원에서의 수업이 마드리드보다 훨씬 노잼이라 (미안 *빅토르…)

동태 눈으로 수업 들으면서 속으로는

끝나고 강 산책 할 계획만 짰다.


(강 정보: Alfonso XIII 라고 치면 나온다…

다리 이름은 이자벨 2세 다리다. 이후부터

강은 “알폰소”, 다리는 “이자벨”로 호칭하겠다.)



폰소와 자벨, 이 둘은 아침에 보는 맛과 해가 완전히 진 후 깜깜할 때에 보는 맛이 다르다.


아침의 알폰소는 쨍쨍한 볕을 받아 윤슬이 번뜩인다. 그 앞에서 햇빛 반사를 받으며 걸어다니면 정말 좋다.


밤의 알폰소는 햇빛 대신 곳곳에 켜진 가로등 불빛으로 빛난다.

물을 발 밑에 두고 앉아서 스낵을 먹거나 좋아하는 노랠 들으면서 멍을 때렸다.



당시엔 멍 때리는 시간이 간절히 필요했던 것 같다.


시끄러운 학교에 매일 출석해야 하는 상황도 아니고, 시간이라면 매일매일 차고 넘칠 만큼 많았음에도 머릿속이 차분한 순간은 거의 없었다.


항상 어떤 생각에 사로잡히거나 거대한 이상을 쫓느라고 골치가 아팠다.

한참 전에 자리잡은 습관들이 유럽으로 간다고 사라지진 않았다.

어디에 있건 내가 나이기 때문에 당연하다.


하지만 1년 전만 해도 스페인에 가면, 유럽에 살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내게 스페인은 가고 싶은 여행지 정도가 아니라

유토피아, 도피처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스페인에 가서 내가 배워 온 것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공간 같은 건 없다는 사실,

불만스런 환경 안에서도 꿋꿋이 버텨야 할 때가 있다는 사실,

내가 스페인에 바랐던 것들이

이미 내 안에 갖춰져 있을 지도 모르겠단 느낌이었다.


이것들만으로 스페인에 다녀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안 다녀왔으면 어쩔 뻔했어!







* 브런치 편집 과정에서 브런치 앱의 오류로

업로드가 미뤄졌습니다.

이번 글에서만큼은 영상과 gif 이미지도

한뭉큼 첨부하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용량 문제로 첨부가 불가능하여

사진들로 대체하였습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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