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아닌 혼자 해내기
새벽 3시 30분에 출발점에 섰다. 불 한 점 없는 산 중이라 칠흑처럼 어둡다. 다들 헤드랜턴을 차고 몸을 풀고 있다. 버스에서 4시간 반을 앉아서 잤더니 몸이 찌뿌둥하다. 자다가 몸이 쓰러질까 신경쓰면서 잤더니 자도 잔것 같지가 않다. 다리도 부은것 같다.
오늘 걸어야 할 거리는 19.5km 10시간 정도 소요된다.
최대한 짐을 가볍게 해서 왔다. 새벽산행도 처음이고 10시간의 등산도 북한산 종주이후 처음이라 많이 긴장된다. 하지만 처음 가보는 길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기에 설레는 긴장감을 느낀다. 도시락도 2개를 싸야했기에 다른 짐은 최소한으로 챙겨왔다.
스트레칭으로 찌뿌둥해진 몸을 풀고 신발끈을 조여맸다. 가방끈도 조이고 스틱을 걷기 좋게 뽑았다.
다행히 6월의 새벽이라 공기가 선선해서 걷기엔 아주 좋은 날씨다.
그가 옆에서 내 등을 토닥토닥하는 것 같다.
선두가 출발하고 나는 오늘도 중간에 서서 걷기 시작한다.
새벽산행은 오직 헤드렌턴에 의지해 걸어간다. 사방이 어둡고 함께 이동하다보니 거의 앞사람 발만 보며 걷게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채 걷는 시간이 좋다. 생각이 왔다가 사라지고, 또 다른 생각이 왔다가 사라진다.
그렇게 생각이 오고 가는 걸 보며 오르막을 올라간다. 산행 초입은 늘 오르막이라 힘이 든다.
어느정도 올라가서 능선이 나올때까지는 계속 오르막 길이다.
6월이라 2시간정도 걷다보면 조금씩 하늘이 열리기 시작한다.
검은색에서 보라빛과 핑크빛으로 그리고 파란빛으로 물들며 아침 동이 터온다.
이 순간을 산에서 맞는건 특별한 선물을 받는 기분이다. 그 시간에 깨어있는 사람들에게만 우주가 주는 선물.
운무가 산허리에 걸려 굽이굽이 아름다운 장관을 펼치고 있다.
마을은 운무 아래에 가려져 있다. 그 모습도 포근해 보인다.
첫 선물을 받은 초보 산꾼은 설레임 가득한 마음으로 눈을 떼지 못한다.
좋은 에너지가 내 안에 가득차는 느낌이다.
어느정도 오르막이 끝날때 쯤 쉬어가기 좋은 편평한 곳을 만난다. 가방을 내려놓고 숨을 돌린다.
대원들은 서로 농담도 하며 즐거운 분위기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낯설기도 하고, 체력이 괜찮은지 몸 상태도 점검하느라 멀찍이서 웃움소리만 귀에 담으며 긴장을 놓지 못하고 있다.
걸을땐 걷느라 생각이 안 났는데, 쉬면서 경치를 보니 그의 생각이 난다.
그를 보내고 히말라야를 가기로 결심한 후 다시 우리의 집으로 돌아왔다.
익숙한 편안함과 낯선 적막감이 동시에 나를 감싼다.
모든것이 그대로인데 그이만 곁에 없다.
그가 누워있던 소파와 음식을 나누던 식탁을 보니 투병할 때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가 잠시 출장 간 듯 아직도 혼자 남은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
낯선 공기 속에서 이 곳 저 곳 돌아보다 그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소파에 누워본다.
'내가 더 잘 했더라면 좋았을걸'
'수술을 받도록 설득했다면'
'병원에 좀 더 빨리 갔더라면'
후회와 자책이 밀려든다.
흐르는 눈물을 그냥 두고 그의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다시 출근하던 첫 날, 책상에 앉았다.
의자에 앉으면 자연스레 보이는 왼쪽의 전화기에 시선이 갔다.
"흑!"
나도 모르게 신음 소리와 함께 눈물이 나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한참을 목놓아 울었다.
응급실로 실려가기 몇일 전, 그가 다 쉰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몸이 점점 안 좋아지다보니 목소리도 쉬어가고 있었다.
"나 사이다 한 모금만 마시면 안될까?"
물어보지 않고 그냥 마시면 될텐데, 음식 하느라 힘든 나를 생각해서인지 나에게 허락을 구하는 그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보는 순간 생생하게 들려왔다.
이렇게 갈 줄 았았다면 먹고 싶은 거 실컷 먹게 해줄껄. 가슴을 치며 울었다.
아침은 모든 대원들이 함께 모여 먹는다. 도시락 자체가 원래 맛있는 건데, 산에서 먹으면 더욱 맛있다.
적게 먹어도 배가 부르다. 걸으며 깔깔거리는 웃음의 양념이 버무려져서 그런것 같다. 한가지 반찬만 준비해와도 모두 같이 먹으니 풍요로운 성찬이다.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또 걷는다.
걷다가 보니 선두로 가던 사람들이 앞에 모여 있는게 보인다. 모두 머리를 위로 젖히고 서 있다.
'왜 저기 모여 있는거지?'
가까이 가보니 열매를 따먹느라고 다들 고개를 들고 있는거였다.
까만 열매를 입에 넣으니 달콤한 맛이 났다. 어릴적 시골에서 따먹고 놀던 생각이 나서 계속 손이 갔지만
뒤에 오는 대원들 몫을 남겨두고 또 걷는다.
이제는 해가 머리 위에 있으니 걸을 때 땀이 많이 난다.
모두들 겉옷을 벗고 최대한 시원한 복장으로 걷고 있다.
쉬어가는 자리는 그늘진 곳이 최고다. 그리고 1.5리터 얼음물을 콸콸 마셔야 더위가 가신다.
그리고 각자 싸 온 간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다. 맛이 있네 없네 간식평을 한참을 하며 또 웃음꽃을 피운다.
오늘 처음 만나는 대원들이지만 산에서 함께 밥을 먹고 걸으며 농담하고 시간을 보냈더니 웬지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가 떠나고 혼자 생활하다가 여러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니 자연스럽게 마음도 좀 여유가 생긴다. 앞으로도 1년반을 함께 할 대원들이다.
모든 대원들이 처음 만나는 건 아니다. 까페에서 이미 평일에 산행을 많이 했던 사람들이 백두대간 방을 만들어 시작했기에 친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나처럼 처음 백두대간으로 시작한 사람은 1-2명 정도인것 같았다.
점심때는 누가 가져왔는지 모르겠지만 양푼이에 나물들을 넣고 비빔밥을 만들어 나눠 먹었다.
실컷 걸으며 땀을 쏙 뺀 후에 먹는 비빔밥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6월의 싱그러운 초록에 둘러싸여 먹는 밥맛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이별의 아픔으로 슬픔에 젖어있는 몸과 마음에 촉촉한 비가 내리듯 갈증을 채워주는 시간과 사람들이었다.
어둠속에서 걸었던 새벽 산행과 선물같은 아침의 기운, 그리고 맛있는 음식과 이야기들, 흙과 바람과 초록의 산을 느끼느라 슬픔에 젖어 있지 않아도 되었다.
3시쯤 목적지인 복성이재에 도착했다.
목적지는 2주 후 다음 산행의 출발지가 된다. 모두 내려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사진속의 나는 출발할때와 달리 얼굴에 조금은 여유있는 웃음을 짓고 있다.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 안.
버스가 출발하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혼자 가겠다고 마음먹고 시작한 여행의 첫 발을 잘 뗀 내 자신이 기특해서일까.
마음 졸이며 했던 긴 산행을 해 낸 후 긴장이 풀려서일까.
혼자 살아가야만 하는 현실을 온 몸으로 확인했기 때문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섞인 기쁨 반, 슬픔 반의 눈물이 계속 흘러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