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세상
주위는 온통 칙칙한 어둠과 젖 비린내로 가득하다. 엄마 옆에는 아기가 누워 있고 엄마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다. 나는 배가 고프다. 이제 두 돌이 지난 나는 배가 고파서 방문을 열고 나가려고 방문 앞에 서 있다. 아득하게 먼 마루, 그 옆 부뚜막에서는 커다란 솥 안에서 무언가 바글바글 끓고 있다.
‘어떻게 내려가지?’ 어린 나는 오랜 시간 서서 망설인다.
결국 내려가길 포기하고 아니 스스로 먹을 것을 찾아 먹을 것을 포기하고 다시 엄마 곁에 눕는다.
배가 고프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만난 세상에서 처음 느꼈던 감정은 ‘배고픔’이었다. 엄마는 동생을 출산하고 누워 계셨고, 아마도 부엌의 부뚜막에 얹힌 솥에서는 미역국이 끓고 있었을 터였다.
방과 부엌이 마루로 이어져 있었고, 마루는 방보다 한참이나 낮은 곳에 있었다. 짙은 밤색의 마루. 부엌과 마루의 경계가 없는 공간 천장에는 알전구 하나가 어둠을 가르며 흐릿한 불빛을 비추고 있었다.
사진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는 이 기억. 내가 세상을 처음 만난 장면이다.
다섯 살
아버지는 세탁소에서 일을 하고 계신다. 세탁소 안의 천장에는 세탁물로 가득하다. 금방이라도 그 세탁물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어린 나는 세탁물들 사이에서 괴물이 나올까 봐 와락 겁이 난다.
아버지의 바쁜 손은 하얀 와이셔츠를 다리미로 다리고 있다. 연신 입으로 물을 “푸우~”하고 뿜으면 물이 “쉬이익~” 소리를 내며 와이셔츠 위로 좌악 퍼진다. 신기하다.
아버지가 나를 부르신다.
“계시야~ 놀자~~”
나는 아버지 바짓가랑이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아버지가 부를 때마다 “나 계시 아니야~ 난 계숙이야~”라고 야무지게 대답한다.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허허허 허”
다시 세탁소 앞마당이다. 5살 된 나는 땅바닥에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다. 그때 외삼촌이 땅바닥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뭘 그렇게 열심히 쓰고 있니?” “아니~ 얘가 벌써 100까지 숫자를 아네~, 형님! 계숙이가 벌써 100까지 숫자를 쓰고 있네요~”
5살 된 나는 더 열심히 숫자를 쓴다. 1,2,3,4,5,6,...... 100.
동생이 태어난 집에서 이사를 한 곳이 바로 아래 세탁소집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세상을 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세탁소를 하고 계셨다. 세탁소 안에는 넓고 넓은 마당이 있는 멋진 집이 있었다. 방이 몇 개나 있었을까? 네모나게 둘러가며 방이 있었는데.
그런데 우리 집은 그 안에 없었다. 우리 가족은 세탁소 바로 옆에 따로 만들어진 부엌이 딸린 방 한 칸에서 살았다.
단칸방에 다섯 식구가 살던 그 집에 외삼촌은 경찰 시험을 보려고 한 달 동안 같이 살았다. 경찰이 된 외삼촌은 정년퇴직을 하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나만 보면 나의 5살 때 일을 소환하셨다.
“계숙이하고 동갑이던 정규는 숫자를 하나도 모를 때 계숙이는 100까지 세더라고~”
6살 어른
엄마가 나를 부르시더니 심부름을 시키신다.
“이 돈 곗돈이니 큰엄마 갖다 드리거라. 잘 갖고 가~”
6살 계숙이는 손에 돈을 들고 흔들며 신나게 큰엄마한테 가고 있다.
젊은 남자가 다가와 6살 계숙이한테 말을 건다.
“내가 너희 큰엄마 잘 아는데 내가 그 곗돈 갖다 드릴게~ 나를 주렴~”
6살 계숙이는 큰 집까지 가지 않아도 되니까 신이 나서 그 돈을 덥석 젊은 남자한테 주고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온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6살 계숙이를 보고 엄마가 놀라서 묻는다.
“아니, 계숙아! 벌써 큰 엄마한테 돈을 드리고 온 거니?”
6살 계숙이는 그 순간 머릿속이 번쩍하는 느낌을 받는다.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어떤 아저씨가...... 큰 엄마한테 갖다 주겠다고 해서 주었어... 요.”
엄마는 왜 6살 먹은 어린 딸한테 곗돈을 맡기셨을까? 난 아직도 궁금하다.
7살 계숙
7살 계숙이는 손에 쌀바가지를 들고 수돗가에 서서 망설이고 있다. 엄마가 아파서 밥을 지으실 수 없어서 집에 밥이 없다. 우리 집은 다시 이사해서 제기동 성당 근처에서 여전히 세탁소를 하고 있다. 엄마는 방에 누워 있다.
‘밥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7살 계숙이가 망설이며 수돗가로 걸어가는데 주인아주머니가 화들짝 놀라서 나오시며 “아이고, 세상에! 네가 밥을 짓겠다고 쌀을 퍼 가지고 오는 거냐?”
7살 계숙이는 대답한다. “네, 엄마가 아파서요.”
“세상에, 기특하기도 하지~ 아니 어린 게 어찌 밥을 할 생각을 했노 쯧쯧”
아버지 목소리는 이전처럼 신나지 않는다. 계시라고 나를 놀려대는 일도 드물다. 아버지 얼굴이 슬퍼 보인다.
아버지는 청량리에서 세탁물을 도둑맞았다고 했다. 세탁물을 맡긴 사람들에게 모두 변상을 해 주어야 하는데 돈이 부족해서 결국 제기동으로 이사를 하셨다고 했다. 제기동의 세탁소는 청량리보다 훨씬 적었다. 세탁소 천장에도 청량리처럼 많은 세탁물이 걸려있지 않았다.
엄마는 막내를 낳고 몸져누우셔서 언니가 살림을 했다고 했다. 12살 언니가 엄마 노릇을 하며 동생 셋을 돌보았다. 아버지는 삶의 의욕을 잃고 많이 고생스러우셨지만 여전히 가족들 생계를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고 언니는 회상하였다. 어둡고 쓰라린 기억이 가득한 그리고 가난했던 유년 시절이었지만 나를 "계시야~"라고 불러주시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그리운 나의 어린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