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3월 4일 고등학교 입학식.
“여러분은 우리 학교가 개교한 이래 가장 우수한 IQ를 가진 학생들입니다. 1학년 평균 IQ가 129예요. 여러분은 금싸라기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우리 학교에 입학한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교장 선생님의 감격스러운 환영 인사가 운동장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다.
‘누가 오고 싶어서 왔나?’ 속으로 삐죽거리며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귓전으로 흘려듣고 있다.
1975년 봄.
담임 선생님의 얼굴이 까맣게 변해 있다. 수심이 가득한 슬픈 눈으로 말없이 우리를 바라만 보고 있다. 굳게 닫힌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뭔가 말을 해야 하지만 선생님은 애써 그 말을 삼키고 있다.
스트라이크에 실패한 지 일주일이 지난 시간. 아직도 우리 반은 정상 수업을 하지 않고 있다. 교장 선생님, 상담 선생님, 주임 선생님…. 많은 선생님이 돌아가며 들어와서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나가고 계신다. 선생님들이 들어와 몇 마디 이야기하면 ‘툭’하고 울음보가 터지며 금방 울음바다가 된다.
서럽다! 내가 지금 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 것도 서럽고, 원해서 이 학교에 온 것이 아닌 것도 서럽다.
이 사단의 주범인 나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한마디 말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교장 선생님의 말씀처럼 우린 금싸라기라는 자부심을 품고 학교생활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학교는 우리를 금싸라기로 대우하지 않았다. 누구나 중학교 때 공부 잘한다는 말을 듣고 고등학교에 진학한 우리였다. ‘고교평준화 정책’이 도입된 원년에 당연히 겪을 혼란을 우리는 진저리 나게 겪고 있었다.
당시 고교평준화 정책은 연합고사 성적에 의해 1차에는 상업 및 실업학교 학생을 선발하고, 2차에는 1차에서 떨어진 학생들과 처음부터 2차에 지망한 학생들을 무작위로 섞어서 서울 도심의 공동학군에 우선 배정하였다. 여기서 배정받지 못한 학생들은 서울을 몇 개의 학군으로 나눠 그 학군에 있는 고교에 강제 배정되었다. 그러니 나처럼 대한민국 최고의 여상으로 꼽히는 우리 학교에 진학하여 진학반에서 대학 입시 준비를 하겠다는 야심 찬 생각을 하고 온 학생들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막상 진학해 보니 교육정책에 의하여 상업 및 실업학교의 모든 진학반은 폐지되었고, 우리가 받아 든 교과서 대부분은 ‘상업’ 자가 붙은 과목들이었다. 상업영어, 상업 부기, 상업 법규 등등. 낯선 과목의 수업을 들으며 ‘그래, 아버지 말씀대로 우선 취업하고 거기서 대학교 진학을 하자.’하고 마음을 다지고 있는 와중에, 점점 더 우리들의 마음을 멍들게 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타자 자격증 취득을 위해 새벽부터 등교하여 타자 연습을 하는데 타자 선생님이 잘하지 못하는 학생들의 머리를 드라이버 손잡이로 ‘톡톡’ 때리고 다니셨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우리 2학년 미 반 학생들이 하나로 뭉쳐 일어났다. 1학년 때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이지만, 1년 동안 학생들 가슴이 시커멓게 숯덩이로 변해가면서 오기와 용기가 함께 자라났다. 나와 몇몇 친구가 선두에 섰다. 우리는 밤이 늦도록 대자보를 작성하고 거사 당일의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당시 방송반장이던 내가 방송하면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 구호를 외치며 우리의 요구를 관철하자는 계획도 세웠다.
우리의 요구는 간단했다. ‘학생들을 체벌하지 말라.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해 달라. 학교의 도서관을 늦게까지 개방해 달라. 교련 시간을 축소해 달라.’
거사 당일, 우리 반 학생들은 팽팽하게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눈짓으로 서로 의견을 교환하면서 겉으로는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예정된 시간에 맞춰 내가 조용히 일어나 방송실로 가려고 뒷문을 여는 순간, 교실 앞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교장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누군가의 겁먹은 고발로 모든 것이 멈추는 순간이었다.
거사는 불발되고 우리 반은 일주일 동안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다양한 선생님들과의 대화시간이 이어졌다. 다행히 학교의 분위기는 조금씩 변해서 우리의 아픔을 이해하는 듯 보였다. 다만 졸업식 사정회에서 해마다 방송반장에게 당연히 주어졌던 「공로상」이 나한테만 주지 않기로 결론 난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1975년 봄에 있었던 우리의 비밀스러웠던 거사는 그렇게 물거품으로 끝났지만, 그 추억은 지금까지 우리를 하나의 끈으로 잇는 멋진 접착제가 되고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을 그저 아름답고 순수했어야 할 여고 시절에 이미 체험해 버린 우리는, 지금도 저린 가슴 한쪽 편에서 그때의 추억을 가끔 소환하곤 한다.
열성적인 동창 은봉이 덕에 여고 졸업 후 25년 만에 ‘미 반 동창회’가 열렸다. 삼삼오오 모인 테이블마다 그간의 안부를 묻느라 정신이 없었다. 담임 선생님은 여기저기 말참견하시며 우리들의 안부를 묻고 있는데 갑자기 26년 전의 그 일이 누군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때 선생님은 선보러 대구에 갔다고 하셨었지요?”
담임 선생님이 대학을 졸업하고 첫 발령을 받아 맡은 첫 번째 학생들이 우리 2학년 미 반이었다. 거사 당일 우리 선생님은 장가를 가기 위해 연가를 쓰고 대구로 내려가 맞선을 보고 오셨다고 소문이 돌았다. 그런데 다녀와 보니 학교가 완전히 뒤집어져서 초상집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교사가 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때 선생님이 얼마나 놀라셨을지, 얼마나 그 상황이 참담하셨을지. 교직 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초임 교사가 겪었을 극심한 마음고생이 어떠하셨을지. 더군다나 사립학교에서 말이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에게 단 한마디도 이유를 묻지 않으셨다. 어쩌면 교사직을 내려놓아야 할 위기 상황이었을 텐데도 우리를 향해 왜 그랬냐는 말씀 한마디 없이 가슴앓이만 하셨다.
첫 번째 ‘미 반 동창회’ 이후 우리는 24년째 해마다 스승의 날과 연말에 담임 선생님을 모시고 동창회를 하고 있다. 2024년에는 담임 선생님을 포함해서 퇴직하신 선생님 스물네 분을 모시고 스승의 날 기념 음식 대접도 해 드렸다. 담임 선생님의 어깨가 으쓱 올라가는 것이 내 눈에 빠르게 잡혔다. 연세가 지긋하신 선생님께서
“난 무엇보다도 「미 반 장학금」을 10년 넘게 지원하고 있다는 것이 제일 감동적이에요.”
하시며 우리를 칭찬하셨다.
우리 모임을 좀 더 의미 있게 하기 위해 장학금을 만들어서 벌써 12년째 당해 연도 2학년 미 반 학생들에게 지원하고 있다. 이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후배가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선배들이 십시일반 준비해서 전해주는 ‘선배 장학금’이다. 이 장학금이 선생님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어 퇴직하신 선생님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칭찬을 받은 것이었다.
초임 총각 선생님 가슴에 그렇게 대못을 박고 곤경에 빠지게 했던 우리 반 친구들은 두고두고 선생님께 사죄하고 있다. 아마도 선생님은 기력이 다해 외출하지 못하는 날까지 ‘미 반 동창회’의 일원으로 기둥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실 것이다.
그동안 여쭙지 못했던 질문을 이제 하고 싶다.
‘선생님, 그때 너무 죄송했어요. 그런데 왜 저희한테 한마디 묻지도 않으셨어요? 그리고 얼마나 힘드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