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위플래쉬>와 책 <그릿>을 읽고
8년의 기다림, 그리고 증명
얼마 전 아이돌그룹 BTS가 광화문에서 공연하며 다양한 외국인들의 관광을 유치하는 등, 막대한 경제효과를 만들어낸 바 있다. 넷플릭스 역대 시청수 순위를 살펴보면, 드라마 부문에는 오징어게임이, 영화 부문에는 얼마 전 아카데미에서 2관왕을 거머쥐었던 케이팝 데몬 헌터수가 당당히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 한국은 전 세계의 선망을 받는 국가가 되었다. 이 위상을 견인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단연 ‘K팝’이다. 하지만 그 화려함 이면에는 데뷔와 동시에 사라져버리는 수많은 별들이 존재한다. 현재의 케이팝 시장은 변화의 호흡이 너무나 빨라져, 7년의 벽을 넘지 못하고 해체되는 팀이 부지기수다.
아이돌 그룹 ‘프로미스나인’도 그중 하나가 될 뻔했다. 시작부터 험난했던 그들은 상승세를 탈 때마다 코로나19, 소속사 이적, 멤버 탈퇴 등 거대한 악재들을 마주해야 했다. 계약 종료가 다가오며 팀의 존립이 불투명해졌을 때, 그들은 과감하게 신생 회사로 자리를 옮기며 5인 체제로 전환하는 승부수를 띄웠다. (신생회사로 옮기는 것은 대다수의 그룹에게는 악재로 작용한다.) 그리고 마침내 데뷔 8년 차가 되어서야 첫 월드투어를 개최하며 인기 아이돌로 우뚝 섰다. 남들이라면 진작 포기했을 우여곡절 속에서도 그녀들은 버텨냈고, 결국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해냈다. 참고로 내 최애는 꿀깅이다 후후 (허..헌이 만세 ��)
두 종류의 그릿, 두 종류의 증명
이들의 행보는 안젤라 더크워스가 말한 ‘그릿(Grit)’, 즉 장기적인 목표를 향한 열정과 끈기를 완벽하게 시각화한 사례다. 더크워스는 그릿을 단순히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의 위계’로 설명한다. 하위의 자잘한 목표들이 최상위의 단 하나,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정렬될 때 비로소 그릿이 발휘된다는 것이다.
프로미스나인에게 이 최상위 목표는 ‘팀의 존속과 증명’이었다. 데뷔 초기의 혼란과 긴 공백기라는 풍파 속에서도 그녀들이 연습실의 불을 끄지 않았던 이유는 “우리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세상에 증명하고 싶어 하는 처절한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8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들은 수많은 하위 목표(컴백, 소속사 이적, 5인 체제 적응 등)를 최상위 목표인 ‘증명’에 맞추어 재정렬해왓따.
하지만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증명의 욕망’이라는 키워드로 또 다른 작품을 떠올려본다. 바로 영화 <위플래쉬>다. 이 영화는 마치 에로 영화나 익스트림 스포츠를 보는 것 같은 엄청난 몰입감과 긴장감을 선사한다. 주인공 앤드류 역시 ‘증명의 욕망’에 완전히 잠식된 인물이다. 그는 전설적인 드러머가 되겠다는 최상위 목표를 위해 손가락이 터져 피가 드럼 세트에 튀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
앤드류의 증명은 스승 플레처가 설계한 가혹한 시스템 안에서 이루어진다. 플레처는 “영어에서 ‘잘했어’라는 말보다 해로운 말은 없어”라며 앤드류를 한계 너머로 몰아 세운다. 앤드류는 이 비정상적인 시스템에 굴복하는 대신, 오히려 그 광기를 흡수해버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플레처가 파놓은 함정을 비웃듯 압도적인 독주를 선보이는 앤드류의 모습은, <그릿>이 말하는 ‘하나의 명확한 상위 목표’를 향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경지를 보여준다.
결국 프로미스나인과 앤드류는 같은 지점에서 만난다. 두 주체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을 위해 무엇을 내려놓을 자신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나의 평범한 일상과 안온함 전체’라고 답하며 증명의 길을 택햇기 때문. 다만, 그 증명의 끝에서 그들이 마주한 풍경은 전혀 다르다.
황폐해진 예술 vs 눈물 나는 서사
프로미스나인의 성취가 우리에게 눈물 나는 감동을 주는 서사라면, 앤드류의 연주는 경탄을 자아내지만 어딘가 서늘하다. 왜일까? 앤드류는 오로지 ‘최고’라는 증명을 위해 주변을 황폐화했기 때문이다. 그는 연인과 헤어지고 가족을 멸시하며 오직 드럼 비트 위에만 자신을 세웠다. 개인적으로 앤드류가 프로미스나인보다 ‘위대한 예술가’가 되었을지는 몰라도, 그의 삶이 ‘가치 있는 삶’이었냐는 물음에는 선뜻 답하기 어렵다.
다행히 <그릿>의 저자 더크워스도 이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그녀는 “그릿이 단지 자아도취적인 성취에 머문다면 그것은 반쪽짜리”라고 말한다. 진정한 그릿은 나만의 즐거움을 넘어 ‘타인에게 기여하는 목적의식’을 가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이다.
프로미스나인은 멤버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기다려준 팬들을 위해 8년이라는 시간을 견뎠다. 반면 앤드류는 오직 자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을 수단으로 삼았다. <그릿>에서 강조하는 ‘이타적인 목적’이 결여된 열정은 위대한 성취를 낼 수는 있어도,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감동 서사를 써 내려가지는 못한다.
무엇을 위한 증명인가
PD로서 영상을 만들다 보면 같은 대본, 같은 촬영본을 가지고도 색감, 자막, 음악에 따라 전달되는 ‘느낌’이 완전히 달라지는 순간을 목도하곤 한다. ‘증명의 욕망’도 마찬가지다. 나를 파괴해가며 정점에 서려는 앤드류식의 증명은 날카롭고 차갑다. 그러나 타인과 연결된 목표를 향해 더디더라도 함께 나아가는 프로미스나인식의 증명은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따뜻한 에너지를 뿜어낸다.
나는 무엇을 위해 증명하고 싶은가? 단순히 타인을 압도하는 ‘실력’인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에너지를 전달하는 ‘가치’인가. ㅎㅎ 답은 정해져있는듯하다. 사실 나는 프로미스나인 콘서트를 보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