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이야기』리뷰
7년 전, 유벤투스의 팬인 나는 기적을 바라고 있었다. 챔피언스리그 1차전 원정에서 2대 0으로 패배한 절망적인 상황. 8강에 가려면 3점 차 이상의 승리가 필요했지만, 상대는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시메오네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였다.
직장인에게 새벽 3시 45분은 가혹한 시간이다. 하지만 나는 호날두의 자신만만한 인터뷰를 믿어보기로 했다. 사실 냉정한 확률보다 ‘내가 사랑하는 팀이 끝내 역전할 거라는 서사’를 믿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끝까지 믿고 응원했다는 그 충만한 애정의 기분이 내 하루를 지탱해 줄 것 같았으니까. 결과는 놀랍게도 호날두의 해트트릭, 그리고 대역전극이었다. 그날의 흥분은 단순한 승리를 넘어, 내가 믿었던 서사의 힘이 고단한 일상을 견디게 해준 소중한 경험으로 남았다.
두 가지 이야기, 그리고 선택의 기로
소설 『파이 이야기』는 이와 닮아 있다. 독자들은 리처드 파커라는 벵골 호랑이와 소년이 태평양을 표류하는 판타지 같은 모험담에 흠뻑 빠져들지만, 결말에 이르러 차가운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조사관들은 묻는다. "바나나가 물에 뜨지 않는다", "식인 섬은 비과학적이다". 그들은 개연성을 따지며 판타지를 걷어내고, 결국 파이는 두 번째 이야기를 꺼낸다. 인간들끼리의 처절한 살육과 식인, 비극만이 남은 잔혹한 생존기. 누가 봐도 '있음직한' 이야기는 후자다. 하지만 놀랍게도 조사관들은 첫 번째 이야기를 믿기로 '결단'한다.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나요?"
조사관들이 호랑이가 나오는 이야기를 선택한 이유는 그것이 더 논리적이어서가 아니다. 그 이야기가 인간을 더 고귀하게 만들고, 우리의 삶을 더 가치 있게 바라보게 만드는 '더 좋은 이야기(Better Story)'이기 때문이다.
삶은 사실이 아닌 ‘해석’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내 삶은 즐거움과 고단함 사이의 파도를 타며 끊임없이 유영하고 있다.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엄격하게 식단을 관리하는 일. 때로는 귀찮은 몸을 일으켜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고, 마음속으로 수만 번 욕하고 싶은 사람을 기어이 사랑하기로 결단하며, 나의 귀한 시간과 돈을 들여 남을 돕기로 마음먹는 일들.
이 모든 행위는 분명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나를 녹초로 만들 때가 더 많다. (무.. 물론 그렇게 잘하고 있는 건 아니다. ㅠㅠ) 그럼에도 내가 이 '귀찮은 루틴'들을 반복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다. 이런 행위들이 결국 나를 더 나은 존재로 빚어갈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이런 치열한 과정을 통과하고 있는 나의 삶이 충분히 '아름다운 항해'라는 확신 때문이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오직 파이만이 알 것이다. 하지만 내 삶이 비극과 우연으로 점철된 '사람 버전'처럼 느껴지는 순간일지라도, 나는 내 삶을 끝까지 '아름다운 모험'으로 해석하며 살아가고 싶다.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은 현실을 버틸 만하고, 심지어 즐길 만한 것으로 만드는 힘은 결국 내가 어떤 이야기를 믿기로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바꿀 수 없어도 서사는 온전히 나의 몫이다. 나는 오늘도 내 삶을 위협하지만 동시에 나를 깨어 있게 만드는 고난들을 '리처드 파커'로 바라보며, 이 항해를 묵묵히 계속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한동안 마음이 멀어졌던 유벤투스의 경기도 다시 챙겨 보며 응원해 주려 한다. (요 몇 년 더럽게 못하긴 한다.. ㅠㅠ 블라호비치 빨리 팔아라 감독 바꿔라 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