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라는 영수증(1)

by BAAM

헐값의 지식과 값비싼 깨달음


두 사람이 같은 책을 읽는다.


같은 페이지를 넘기고, 같은 문장에서 밑줄을 긋는다.

그런데 한 사람은 삶이 바뀌고, 다른 사람은 책을 덮는다.

독후감을 쓰고, 친구에게 추천하고, 다음 책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이것을 개인차라고 부른다.

감수성의 차이, 독해력의 차이,

혹은 그냥 인연이 닿았느냐 닿지 않았느냐.

그렇게 정리하고 넘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같은 강의를 들은 수백 명 중에 실제로 삶이 달라지는 사람은 몇 명인가.

같은 종교를 믿는 수백만 명 중에 그 교리가 진짜 행동을 바꾸는 사람은 얼마인가.


지식은 복제된다. 클릭 한 번으로 전달된다.

그런데 깨달음은 복제되지 않는다. 전달되지 않는다.

그것은 각자가 따로 치러야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나는 이 질문을 오래 붙잡고 있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더 선명해졌다.

같은 책을 읽어도 어떤 사람의 문장에서는 그 책이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의 문장에서는 그 책이 그냥 인용문으로 죽어 있다.


차이가 무엇인지 처음엔 몰랐지만 오래 전 읽은 책을 다시 읽어보니 알게 되었다.

그 책을 읽기 전에 이미 무엇을 겪었는가. 그게 전부였다.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안다


지식은 명제다. 참과 거짓으로 검증된다.

공유될 수 있고, 저장될 수 있고,

다음 사람에게 그대로 전달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공식은 그가 죽은 뒤에도 작동한다.

피타고라스 정리는 피타고라스 없이도 유효하다.


깨달음은 다르다. 깨달음은 명제가 아니라 전환이다.

세계를 보던 방식 자체가 달라지는 것.

그것은 정보의 추가가 아니라 구조의 변화다.


마이클 폴라니는 이것을 암묵지라고 불렀다.

말로 전달할 수 없는 지식.

자전거 타는 법을 아무리 정교하게 설명해도,

실제로 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


폴라니는 말했다.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안다.

그 더 많은 것이 암묵지다. 그리고 그것은 몸으로만 전달된다.

시간과 반복과 실패를 통해


깨달음은 암묵지의 가장 깊은 층이다.


선불교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어리석은 사람은 손가락을 본다.

스승이 가리키는 것은 달이지만 제자가 볼 수 있는 것은 손가락뿐이다.

달을 보려면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봐야 한다.

그런데 달을 보는 방법은 가르쳐줄 수 없다.

어느 순간 스스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


그 시선의 이동. 그게 깨달음이다.


그리고 그 이동은 공짜로 일어나지 않는다.




진리가 착륙할 수 있는 유일한 활주로


깨달음에는 비용이 든다.

비용이란 돈이 아니라 경험의 밀도다.

얼마나 깊이 들어갔는지, 얼마나 오래 버텼는지

얼마나 많이 틀렸는지, 얼마나 진심으로 부서졌는지


배신을 당해본 사람과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 신뢰에 대한 문장을 읽는다.

같은 문장이 다르게 착지한다.


실패를 겪어본 사람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회복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같은 이야기가 다른 깊이로 들어간다.


이것은 감수성의 차이가 아니라 비용의 차이다.

그 문장이 꽂히기 위한 구멍이 이미 뚫려 있느냐, 없느냐.


구멍은 경험이 뚫는다.

그 구멍은 타인이 메워줄 수 없는 나만의 공허이자,

비로소 진리가 착륙할 수 있는 유일한 활주로다.

그것도 아무 경험이 아니라,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통과한 경험이 뚫는다.


니체는 이것을 다르게 표현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흔히 인용되는 문장이지만 대부분 피상적으로 읽힌다.

이 문장의 핵심은 강해진다는 결과가 아니라 조건이다.

죽이지 못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실제로 죽을 뻔한 수준의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가벼운 불편은 사람을 강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냥 지나간다. 진짜 비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똑같이 실패해도 어떤 사람은 깨닫고 어떤 사람은 그냥 넘어간다.

차이는 실패 자체가 아니라 그 실패 앞에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다.

서둘러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고,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끝까지 물은 사람.

그 사람에게만 그 경험은 비용이 된다.


비용을 치르지 않은 지식은 인테리어다.

벽에 걸려 있고, 보기 좋고, 방문객에게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다.

위기가 오면 작동하지 않는다.

실제로 필요한 순간에 손에 잡히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오랜 시간 무언가를 만들며 직접 경험했다.

어떤 개념은 읽은 직후에 바로표현할 수 있었고

어떤 개념은 몇 년이 지나도 쓸 수 없었다.

비용을 치르지 않아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다 어떤 일을 겪고 나서, 그 개념이 갑자기 손에 잡혔다.

개념이 바뀐 게 아니었다.

바뀐 것은 나의 태도였다.

내 안에 그 개념이 들어올 구멍이 생긴 것이다.




서재라는 안전한 감옥


인간은 본능적으로 고통을 회피한다.

그것은 생존 본능이다.


문명은 그 회피를 더 정교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이제 클릭 한 번으로 정제된 깨달음을 살 수 있다.

누군가 평생 겪어서 얻은 통찰을 열다섯 페이지짜리 요약본으로 소비한다.

누군가 십 년을 걸어서 도달한 결론을 팟캐스트 한 에피소드로 흡수한다.

빠르고, 효율적이고, 무엇보다 통증이 없다.


그런데 그렇게 얻은 것은 지식이지 깨달음이 아니다.


순전히 위로를 목적으로 설계된 텍스트가 있다.

읽기 쉽고, 따뜻하고, 덮고 나면 기분이 나아진다.

그런데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는다.

비용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자의 구조를 건드리지 않고 표면만 쓰다듬는다.

상처를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반창고를 붙이는 것이다.

비용을 요구하지 않는 텍스트는 깨달음을 만들지 못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카프카의 소설은 읽기 불편하다.

해석이 안 되고, 결론이 없고, 읽고 나서 기분이 이상하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 카프카는 삶을 바꾼다. 왜인가.

그 불편함이 비용이기 때문이다.

텍스트가 독자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요구를 감당한 사람에게만 무언가가 열린다.


지도를 읽는 것과 실제로 걷는 것의 차이다.

상상력이 풍부한 인간은 지도를 보며

풍경을 시각화하고, 소리의 질감까지 유추해 낸다.

하지만 그곳에는 냄새가 없다. 그것은 현장의 습도와 온도가

내 감각과 정면으로 충돌할 때 발생하는 실재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안락한 관람석을 제공하지만,

냄새가 거세된 관람석에는 현장감이 존재하지 않는다.

냄새를 모르는 깨달음은 죽은 풍경화와 같다.


그런데 우리는 점점 걷지 않고 지도만 수집하며,

그 평면적인 정보가 주는 가짜 안전함에 안주한다.

지도가 정교해질수록 실제의 경험을 번거로운 확인 절차로 격하시킨다.

이미 알고 있다는 오만은 우리를 서재라는 안전한 감옥에 가둔다.




정답을 지우고 질문을 남기는 이유


좋은 스승은 비용을 대신 내주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산파술(産婆術). 아이를 낳는 것은 산모가 해야 한다.

산파는 그 과정을 도울 뿐이다. 대신 낳아줄 수 없다.

소크라테스가 한 것은 질문이었다. 끊임없는 질문.

그 질문이 상대방 안에 이미 있는 것을 끌어내도록 지식을 주입한 것이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 비용을 치르도록 압박한 것이다.


랑시에르가 《무지한 스승》에서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코토는 학생들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냥 책을 던져주고 알아서 읽으라고 했다.

설명이 없으니 학생들은 스스로 길을 찾아야 했다. 그 과정이 비용이었다.

그 비용을 치른 학생들은 배웠다. 설명을 들은 학생들보다 더 깊이.


설명은 때로 비용을 면제해 준다.

그래서 배움을 막는다.


나는 누군가에게 내가 깨달은 것을 전달하려 할 때마다 이 벽에 부딪힌다.

말로 설명할수록 상대방이 더 모르게 되는 느낌.

설명이 정교해질수록 상대가 직접 겪어야 할 것을 내가 대신 처리해 주는 느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질문을 남기는 것뿐이었다.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 비용을 치르게 만드는 질문.


그게 글쓰기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다.



약탈당하지 않는 유일한 재산


지식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고, 공유될수록 더 풍부해진다.


그런데 깨달음은 다르다.

아무리 훌륭한 스승도 제자를 대신해서 깨달을 수 없다.

아무리 완벽한 책도 독자를 대신해서 살 수 없다.

각자가 자신의 궤도 위에서, 자신의 속도로, 자신의 비용을 치르며 도달해야 한다.


궤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같은 지점에 도달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배신을 통해 오고,

어떤 사람은 실패를 통해 오고, 어떤 사람은 상실을 통해 온다.

도달한 지점이 같아 보여도 그 질감은 다르다.

어떤 비용을 치렀는가에 따라 같은 깨달음도 다른 두께를 가진다.


이것은 불공평하게 느껴질 수 있다.

더 많이 겪은 사람이 더 많이 아는 세계.

더 많이 부서진 사람이 더 단단해지는 구조.

그런데 어쩌면 그게 가장 공평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당신의 비용을 대신 낼 수 없고,

아무도 당신의 깨달음을 빼앗을 수 없다.

당신이 치른 것은 온전히 당신의 것이다.

누가 뺏어갈 수 없고, 시간이 지워도 몸에 남는다.



아르키메데스의 왕관


모든 깨달음에는 영수증이 있다.

어디서 얼마를 치렀는지,

무엇이 부서졌는지, 얼마나 오래 버텼는지.

그 영수증은 외부에 보이지 않는다.

학위처럼 액자에 걸 수 없고, 이력서에 쓸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을 가진 사람과 가지지 않은 사람은,

같은 말을 해도 다르게 들린다.

독자는 그것을 논리가 아니라 감각으로 안다.

이 사람이 실제로 이 고통을 통과했는지,

아니면 남의 문장을 빌려온 것인지.


이 감각의 정체에 대해서 아르키메데스의 왕관이 그 답을 쥐고 있다.

아르키메데스가 발견한 것은 부력이었지만, 그 본질은 밀도였다.

세공사가 금 일부를 빼돌리고 은을 섞었다면,

겉모양과 무게는 완벽하게 흉내 낼 수 있어도

물속에 넣었을 때 넘치는 물의 양은 결코 속일 수 없다.

언어는 도금할 수 있지만, 삶의 밀도는 속이지 못하는 법이다.


비용을 치르지 않고 쌓인 문장에는 어딘가 공기가 빠져 있다.

삶이라는 수조에 문장을 담그는 순간,

그 문장이 지불한 고통의 부피만큼만 진리는 떠오른다.




나는 오늘 나의 영수증을 갱신했는가.

아니면 남이 버린 영수증을 주워 내 것인 양 연기하고 있는가.


깨달음의 세계에 대리 결제란 없다.

오직 자신이 지불한 만큼만 자기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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