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의 피를 잠재우는 일

나희덕〈풍장의 습관〉

by 디디온

가까운 이들의 이른 죽음이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 것은 나에게 다행한 일이다. 친구의 친구나 지인의 부인의 경우 그런 경우가 더러 있었지만, 나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는 않았었기에 죽음은 그저 지나가는 것이었다. 김형경의 책이 주목을 끌던 시절 한겨레문화센터에서 비슷한 강좌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한 번은 모두 둥글게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한 여자의 이야기가 잊히지 않는다. 고등학교 시절 소풍을 앞둔 전날 엄마가 자살한 이야기였는데, 그분의 눈에 맺히던 눈물이 아직도 생생하다. 결혼하여 딸을 두고 있지만 가끔 자신도 아이를 놓아두고 죽을까 봐 두렵다는 이야기도 했고, 사랑하는 딸을 놓아두고 그런 결정을 한 엄마를 이해하기 힘들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늠름한 청년으로 자란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이야기를 하던 아버지는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최근 나희덕 산문집《마음의 장소》에서 다음 구절을 읽으면서 그때의 일이 생각났다.


“때 이르게 떨어진 열매들을 보면 먼저 세상을 떠난 동생 얼굴이 떠오른다. 식물이든 사람이든 잎이 지고 열매가 떨어지는 것은 한결같지 않은 일이다. 예상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니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한 접시의 가을이 읽어간다〉에서)


‘먼저 세상을 떠난 동생 얼굴’ 이란 말에 잠시 멈췄다. 시〈풍장의 습관〉이 어떻게 쓰이게 되었는지 이 구절이 암시한다. 시인은 여물기 전에 땅에 떨어져 뒹구는 열매들을 몇 개씩 주워온다고 이야기하는데,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


풍장의 습관


방에 마른 열매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책상 위의 석류와 탱자는 돌보다 딱딱해졌다.

향기가 사라지니 이제야 안심이 된다.

그들은 향기를 잃는 대신 영생을 얻었을지

모른다고, 단단한 껍질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려본다.

지난 가을 내 머리에 후두둑 떨어져 내리던

도토리들도 종지에 가지런히 담겨 있다.

흔들어보니 희미한 종소리가 난다.

마른 찔레 열매는 아직 붉다.

싱싱한 꽃이나 열매를 보며

스스로의 습기에 부패되기 전에

그들을 장사지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때 이른 풍장의 습관으로 나를 이끌곤 했다.

바람이 잘 드는 양지볕에

향기로운 육신을 거꾸로 매달아

피와 살을 증발시키지 않고는 안심할 수 없던,

또는 고통의 설탕에 절인 과육을

불 위에 올려놓고 나무주걱으로 휘휘 저으며

달아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던 나는

건조증에라도 걸린 것일까.

누군가 내게 꽃을 잘 말린다고 말했지만 그건

유목의 피를 잠재우는 일일 뿐이라고,

오늘 아침 방에 들어서는 순간

후욱 끼치던 마른 꽃 냄새, 그 겹겹의 입술들이,

한 번도 젖은 허벅지를 더듬어본 적 없는 입술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나비처럼 가벼워진 꽃들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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