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속도를 늦추고 나를 바라다보는 시간
《조용한 빛을 건너며, 엠아트센터에서》
엠아트센터의 문을 들어서는 순간,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문틈에서 멈추고
안쪽으로 잔잔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전시장은 언제나 그렇듯
먼저 마음의 속도를 낮추는 법을 알고 있었다.
눈앞의 작품들은 화려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작은 떨림으로,
조용하지만 또렷한 온도로
마음 한쪽을 가만히 두드렸다.
마치 “괜찮니?” 하고
소리 없이 건네는 따뜻한 안부처럼—
말없이도 깊이 들어오는 온기였다.
그 앞에 선 나는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작품에게 조용히 읽히고 있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로는 붙잡기 어려운 부드러운 따스함이
가슴 깊은 곳의 굳어 있던 결을 하나씩 풀어내며
오래된 겨울의 온도를
천천히 녹여주었다.
그 온기가 길게 스며들수록
내 마음의 호흡도 함께 느려졌다.
그래서인지
전시장을 걷는 내 걸음은
점점 더 부드럽고 고요해졌다.
십자가 오브제의 가녀린 결은
손끝에 닿지 않아도 오래된 기도의 온기를 품은 듯
차분한 숨결을 건네왔고,
도자기는 차갑게 빛날 거라 생각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마음 깊은 곳을 순하게 비추는
작은 등불처럼 느껴졌다.
패브릭 우산마다 머금은 색의 온도는
내 안에 숨어 있던 오래된 기억들을
살며시 흔들어 깨웠고,
드로잉 작품 속 연약한 선들은
지워질 듯 사라질 듯한데도
오히려 그 연약함 덕분에
섬세한 떨림처럼
가슴 깊숙한 곳까지 흘러들어왔다.
조용히 숨을 고르며
한 작품에서 다른 작품으로 걸음을 옮기자,
전시장의 공기는 더 깊은 울림으로 변해갔다.
처음엔 작품들이 나를 바라보는 듯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그 결들을 천천히 쓰다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벽을 따라 이어진 그림들은
형체보다 그 사이에 머문 ‘멈춤’을 보여주고 있었고,
그 여백 속에서
나의 마음도 잠시 조용히 머물렀다.
조명의 반사, 캔버스의 입체감,
작가의 숨이 스쳐 간 듯한 질감들—
그 작은 흔적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자
나는 관람자가 아니라
그 세계 안으로 초대받은 사람처럼
작품들 사이에 부드럽게 놓여 있었다.
전시 후반부,
그곳의 공기는 더 잔잔했고
정적마저 따뜻했다.
작품들은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키며
아주 느린 속도로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한참 동안 한 작품 앞에서 멈춰 섰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내 안의 오래된 감정 하나가
아주 작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과 면의 방향,
색이 쌓인 깊이,
의도인지 우연인지 모를 작은 흔적들까지—
모든 것이 내게
“이 순간을 얼마나 간직하고 싶니?”
하고 묻는 듯했다.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그 단순한 호흡만으로도
굳어 있던 내 안의 무언가가
파르르 풀려 내려갔다.
전시장을 나서기 직전,
마지막으로 뒤돌아본 작품들은
처음보다 작은 빛으로,
그러나 더 깊은 울림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이 여운은 천천히 네 속도로 가져가도 돼.”
라고 말하는 것처럼.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스쳤지만
나는 이상하리만큼 따뜻했다.
전시 안에서 머물던 온기가
아직도 내 어깨와 마음에 고요히 내려앉아 있었다.
전시장을 나서는 발걸음은
들어올 때보다 조금 더 가벼웠고,
마음속 온도는 눈에 보이지 않게
1도쯤은 더 올라 있었다.
그 1도의 온기가
오늘의 전시가 나에게 남긴
아주 조용하지만 확실한 선물 같았다.
내 마음의 속도를 잠시 늦추고
잊고 지낸 감정의 결을 다시 만져보게 하는—
그래서 결국,
나를 다시 바라보게 해 준 시간.
아마 오늘의 전시는
당분간 내 안에서
천천히 계속 빛날 것이다.
#12월은 동동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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