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생명, 구조와 깊이를 그린 두 거장 - 르누아르와 세잔.
한불수교 140주년 오랑주리미술관 특별전 한가람미술관
나는 그림을 보러 전시장에 들어섰지만,
나올 때는 사유의 방향 하나를 마음에 들이고 있었다.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 파울 클레
르누아르의 그림 앞에서 나는 오래된 기억처럼 천천히 풀어졌다. 피아노를 치는 소녀들의 손끝에는 소리보다 먼저 빛이 번져 있었고, 광대 옷을 입은 아이의 얼굴에는 아버지의 시간이 고요히 내려앉아 있었다.
세잔의 그림 앞에서 나는 저절로 속도를 늦추게 되었다.
그의 사과는 달콤해 보이지 않았고, 그릇은 친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자리에 분명히 있었다. 무게를 가지고, 질서를 가지고. 세잔은 사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사유가 머무는 자리를
화폭 위에 놓아두었다.
르누아르가 마음을 풀어주는 화가라면, 세잔은 생각을 붙들어 세우는 화가이다. 그의 정물은 사유의 무게를 남겨준다.
르누아르는 늘 삶을 외면하지 않는 화가였다. 기쁨과 일상,
피부 위에 닿는 빛의 온기를 끝까지 놓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보는 이를 밀어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곁으로 불러온다.
"왜 예술이 있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삶이 이미 충분히 힘들기 때문이다."
-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이 전시는 친절하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는다.
설명은 곁에 있지만, 생각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그림 앞에 서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시선은 조용해진다.
나는 점점 덜 보게 되고, 생각은 천천히 꽃을 피운다.
전시장을 나서며 나는 알게 된다.
그림은 벽에 남았지만 생각은 나를 따라 나왔다는 것을.
오래 바라볼수록 보이는 것은 줄어들고, 대신 침묵 속에서
사유가 자라난다는 것을.
“생각은 침묵 속에서 자란다.”
— 한나 아렌트
“천천히 보아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 정현종
이 전시 앞에서, 오래 미뤄두었던 사유의 속도를 다시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