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적 무자비함'이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이야기
한 아이가 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아동보호시설을 전전해온 아이. 반복되는 도벽과 또래들과의 충돌로 여러 시설을 떠돌았고, 마침내 또 다른 시설에 정착하게 되었다.
새로운 곳에서도 그는 여전했다. 도벽과 공격성으로 주목받았고, 또래 아이들과는 매일 같이 다퉜다.
어느 날, 그 아이는 친구들과 편의점에 들렀다가 혼자 몰래 음식을 훔쳐 먹었다. 그 일이 퍼지면서 학교에서는 따돌림이 시작됐다.
등교를 피하려 일부러 늦잠을 자는 척했고, 결국 몸은 지각했고, 마음은 더 늦게 도착했다.
그날 아이는 학교에서 멍한 얼굴로, 말없이 혼자 앉아 있었다.
그런 아이가 담임교사의 눈에 들어왔다.
담임교사가 물었다.
"혹시 시설에서 누가 때렸니?"
아마 그 전에도 몇 번이고 질문을 던졌겠지만,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질문에, 아이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번.
그것으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아이는 피해자가 되었고, 시설장은 아동학대 협의로 고발되었으며, 1년이 넘도록 함께 했던 상담사는 사건에서 배제되었다.
경찰 조서에서 아이는 놀랄 만큼 '기승전결'이 명확한 이야기로 사건을 진술했다.
그 아이를 오래 상담했던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건 그 아이가 진실을 말할 때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 아이는 진실 앞에는 항상 침묵을 선택해 왔기 때문이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남겨진 아이들 사이에서는 더 깊은 분열과 고발이 이어졌고, 결국 시설은 무너졌다.
아이들은 각기 다른 지역으로 흩어졌고, 나는 그제야 묻게 되었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믿었고, 무엇을 보지 못했던 것일까.
이 이야기는 단순히 '어른들이 순수한 아이를 괴롭히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뒤틀린 이야기다.
아이들은 순수하다. 그것은 맞다.
하지만 동시에 아이들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기도 하다.
아직 배려를 배우지 못했고, 타인의 입장을 헤아리는 법을 모른다. 그래서 때로는 잔인할 정도로 솔직하고, 때로는 무자비할 정도로 직접적이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아이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 사랑 안에는 자신의 불안과 욕망이 뒤섞여 있다.
선의로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선의는 종종 상대방의 감정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는다.
정서적 무자비함이란, 바로 이런 감정의 속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감정이 억압되는 사회에서 다정함조차 통제의 수단으로 작동하고, 돌봄이 조건화되며, 침묵이 오해되는 정서 구조.
그리고 무엇보다, 정서 자체가 때로는 무자비하게 흘러가는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
정서적 무자비함은 소리를 지르거나 직접 상처를 입히는 폭력적인 언어가 아니다.
오히려 다정한 얼굴 아래 작동하는, 감정을 지워내는 은밀한 장치다.
그리고 그 장치는 어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도, 우리 모두에게 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성찰이다.
"나는 실천가도 아니고,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니다.
하지만 감정이 잘못 읽힐 때 벌어지는 참담함을 지켜본 목격자로서, 지금 이 말들을 기록하려 한다."
그리고 더 깊은 고백을 한다면,
"나 역시 그랬다."
상대방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상대방의 감정을 무시했고, 선의라는 이름으로 상처를 주었다. 좋은 의도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정서적으로 무자비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이 글은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가진 정서의 무자비함을 인정하고, 그것과 어떻게 건강하게 공존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요즘 아이들은 감정을 핑계로 삼는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내가 잘못할까 봐 무섭다', '아무도 내게 관심 없다'는 말들은 처음엔 아프고 애틋해 보인다.
하지만 그 속에는 때로 책임을 회피하고,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먼저 주저앉는 기술'**이 숨어있기도 하다.
반대로 어른들은 아이들의 감정을 '관리'하려 든다.
감정을 분석하고, 해석하고, 때로는 무시한다.
**'다 너를 위해서'**라는 말로 아이의 현재 감정을 미래의 이익으로 치환해버린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들:
감정은 언제부터 '증거'로 호출되기 시작했는가?
왜 아이의 감정은 항상 참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어른의 감정은 늘 의심받는가?
왜 어른의 감정은 항상 합리적이어야 하고, 아이의 감정은 늘 이해받아야 하는가?
정서적 돌봄은 왜 이토록 위태로워지고, 무력화되었는가?
"정서적 무자비함"이라는 말은, 이 모든 질문이 쌓여 만들어낸 언어다.
그것은 폭력적인 말투가 아니다.
다정함이라는 이름 아래 감정을 억압하고,
돌봄이라는 명목 아래 감정을 통제하며,
사랑이라는 이유로 감정을 왜곡하는
우리 모두의 감정 구조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글은 아동을 위한 글이 아니고, 어른을 비난하는 글도 아니다.
인간의 정서가 갖는 복잡함과 양면성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조금 더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가려는 모든 사람을 위한 글이다.
교사, 상담자, 부모, 보호자, 또는 단순히 감정을 책임지려 했던 누군가에게 바친다.
감정이 '사라진다'는 느낌을 견뎌낸 이들에게, 이 글이 다시 물어주기를 바란다.
우리는 언제부터, 어떻게 감정을 오해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우리의 감정은 정말로 우리를 배신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감정을 배신한 것일까?
정서는 무자비하다.
하지만 그 무자비함 속에도 지혜가 있다.
그 지혜를 찾아가는 여정이 바로 이 글의 목적이다.
완벽한 답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질문하고 함께 찾아가려는 것이다.
당신도 함께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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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있다.
책의 전체 내용중 핵심만 뽑아서 1회부터 15회까지 마무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