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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은주 Sep 17. 2024

완벽주의를 꿈꾸는 너에게

(그림책: 「나 하나로는 부족해」)

  달력을 두세 개씩 달고 살던 때가 있었다. 날짜 아래 허락된 좁은 면으로는 밀려드는 일정을 다 기록해 둘 수 없어 접착 메모지의 덧작업이 필요하였다. 꼭 챙겨야 하는 행사로 별표 표시라도 한 날짜에는 또 반드시 그날에 해내야 하는 다른 일정의 표기가 마뜩잖았다. 그렇게 달력 하나로는 부족하여 업부별 분야별로 달력을 늘려가며 완벽한 일 처리와 완벽한 인간상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어수선한 방과 함께 너무너무 바쁜 ‘레오’가 등장한다. 해도해도 끝나지 않는 일. 두서없이 일에 덤벼들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쌓인 일들 앞에서 생각한다. 계획표를 작성해서 차근차근, 목록을 하나하나 지워가며 일을 처리해 나간다면 완벽한 끝과 마주하게 될 거야! 레오 또한 계획표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할 일’을 적어 내려간다. 처리의 유무를 확인할 수 있는 체킹박스를 넣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메모지 하나로 시작된 계획표는 어느 순간 돌돌 말아도 될 정도의 두루마리가 되어 버린다. 계획표의 늪에 빠져 결벽처럼 체킹에 목을 매는 또 한 명의 완벽주의자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 그림책의 표지에는 두루마리도 모자라 산처럼 쌓여있는 ‘할 일’들의 계획표 더미 위에 서 있는 레오가 그려져 있다. 레오는 이제 막 그 ‘할 일’의 첫 목록을 들여다 보고 있다. 그림대로라면 레오는 ‘할 일’의 그 끝과 마주하는 것이 요원해 보인다. 그림책 뒤표지에도 ‘할 일’들이 하나의 산봉우리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계획표에 적힌 ‘할 일’들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표지를 들추면, 표지 뒤로 연결되는 면지가 등장한다(‘면지’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기술해 보려 한다). 유선노트를 연상시키는 화면 안에 빼곡히 들어찬 ‘할 일’들의 기습에 숨이 턱 하니 막혀온다. 자전거 고치기, 옷장 정리하기, 멍멍이와 산책하기.... 전구 갈아 끼우기, 바이올린 연습, 계단 청소하기, 건전지 사기, 치과 가기, 학원 등록하기, 세수하기, 화분에 물 주기, 약속 취소하기..... 계획표 다시 만들기......  


   생각보다 대단치 않은 사소한 ‘할 일’들에 풋 하고 웃음이 삐져나오는 독자도 있을 것이고, 한 편으론 사소한 일조차 목록을 만들어 확인해야 할 만큼 완벽한 일상을 추구하는 레오의 모습에 측은함을 느끼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세수를 하는 것마저 확인해야 하고, 그도 모자라 ‘한 일’을 다시 확인하면서 새로운 계획표를 만들어야 할 지경이라면 완벽주의는 더 이상 일상을 완벽하게 만드는 이념이 아니라 ‘병’인 것이다.


   레오는 자신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끼며 분신이 있어 함께 처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부족한 하나의 달력을 대체하기 위해 여러 개의 그것을 마련해야 했던 나처럼 말이다. 분신처럼 등장하는 레오. 둘이서 그 모든 할 일들이 해결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웬걸 레오가 둘이 된 만큼 할 일도 두 배로 늘어난다. 그렇게 레오는 그림책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마술처럼 늘어나 열 명이 되기에 이른다. 열 명의 레오가 바쁘게 뛰어다니며 계획표의 일을 처리하는 모습이 한쪽 면 가득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럼에도 완벽한 끝과 마주할 수 없는 건, 그사이 일이 열 배로 늘어나 있기 때문이다. 


   달력이 두세 개로 늘어나면 더 완벽한 일 처리와 더 완벽한 내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늘어난 달력의 개수만큼 더욱 쪼개진 일들 사이에서 더욱 강도 높은 완벽주의의 기승을 견디면서 나를 마모시켜 갈 뿐이었다. 다행히 레오는, 열 명의 레오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소진된 자신을 돌아본다. 나른한 낮잠 속 부드러운 꿈 가운데 ‘다 못 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면 어떨까?’ 자신에게 제안을 하고, ‘그럼 나 하나로도 충분해’ 스스로의 기량을 인정하며, ‘그냥 나 혼자.... 꿈도 꾸면서 하면 되지’ 완벽주의자에서 꿈꾸는 삶으로 선회한다. 뒤 면지(뒤표지와 연결되는 지면)에서 빈 유선노트 아래 팔베개를 하고 드러누운 레오의 모습에서 더 이상 일에 쫓기지 않는 편안함이 느껴진다. 


   이 세상에 나 하나로 부족한 일이 있다면 그건 애초 두 사람이 해야 할 몫이었을 것이다. 사람에게 달력은 하나면 족하고, 계획표의 ‘할 일’은 메모지 한 장이면 충분하다. 완벽주의는 계획표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 불안이 키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완벽주의를 꿈꾸는 당신.... 스케치 그림이 편하게 다가오는 피터 레이놀즈의 이 그림책에서 레오를 꼭 만나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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