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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신미 Oct 09. 2023

시간의 맛

“Seasoned”

영어의 수식 중에 seasoned, 시즌드, 라는 말이 있다. 시즌 즉 계절을 겪었다는 뜻이니까 경험이 많다, 그래서 능숙하다의 은유로 쓰이기도 하고, 때로는 연식이 있어 낡음을 뜻하기도 한다. 시즌드 교사는 오랜 경험으로 능수능란하게 학급을 운영해 나가는 선생님을 떠올리게 하고, 시즌드 자동차는 아직 탈만 하지만 낡아서 많은 풍상을 지나왔음이 분명한 차인 것이다. 편해서 날마다 들고 다니다가 어느날 오후 햇살에 문득 눈에 들어오는 핸드백의 닳고닳은 손잡이. 그런가 하면, 같은 단어의 변주인 시즈닝은 양념을 뜻한다. 후추와 소금을 포함해서, 파슬리, 세이즈, 로즈메리와 타임같은 갖은 향료와 맛냄이들을 통틀어 이르기도 하고, 그 “양념을 뿌려 맛을 내다”도 된다. 그러니까 “시즌드” 하면 양념이 된, 맛이 든 것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이렇게 관록과 고단함이 저절로 그만의 알록달록한 맛으로 남는 것. 그 맛이 깊숙이 배어 들어 멋진 만찬이 되기도 하는 것. 인생은 시간이고 그 시간이 주는 맛이란 그윽하게 배어들어 쉬이 사라지지 않는 특징이 있다.

“질금”

질금, 그 깊고 아늑한 단어를 나는 얼마전 처음으로 알았다. 코비드 격리 기간 머물던 소도시에서 새로 사귀게 된 이웃이 친정 엄마가 만들어 줬다며 질금 물엿을 한 병 갖고 왔다. 이 작은 도시에서 나고 자라 외국 여행도 한번 가보지 않았다는 그녀가 무심히 “질금” 이라 말할 때, 그 단어의 맛이 참으로 고상하고 참신했다. 질금? 처음 대하는 단어여서 적어 두었다가 그 뜻을 검색해 보았다. 거두어 들여 말린 보리를 며칠이고 물 뿌려가며 불렸다 따뜻한 곳에 덮어두어 싹이 나게 하고, 그것을 다시 며칠이고 말렸다 비벼서 얻는 물엿. 그것을 찹쌀밥과 함께 끓이고 졸여 베 보자기에 짜서 얻는 미미한 단맛. 거르고 걸러 얻는 원초의 맛. 서두르지 않으며 조용히 익어 감을 기다리는 시간의 맛. "질금"이다. 이런 품위 있는 말이 이 나이에 나를 찾아 주다니! 인생의 깊고 섬세함에 감탄하며 인생선생님 앞에 몸을 낮춘다. 한편, 시간의 가치를 무시하며 조급함과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 “찔끔”이 거기서 나온 것이 아이러니해서 슬쩍 웃음이 나기도 했다. 찔끔 살지 말고 질금 살아내야 할 텐데. 

시간의 맛

이처럼 시간의 특성에는 속도만이 아니라 깊이도 있음을 절감한다. 원격으로 일처리를 하고 혼자 있는 시간도 많았던 지난 삼 년여 동안 찾게 된 여유로, 요즘 나는 그 또다른 시간의 모습을 발견하며 놀라워하고 있다. 오래된 저택 육중한 문 뒤 내밀한 곳에 옛날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다락방 같기도 하고, 검게 번득이며 깊숙한 곳에서 퍼 올려지기 만을 벼르고 있는 우물물 같은, 그리고 엿기름이 되기 위해 삭아가는 곡식의 은근한 온기 같기도 한, 그 살아있는 시간의 진면목. 결코 지름길이 없는 살아 냄, 서두를 수 없는 시간의 인색하리만큼 엄격한 한걸음 한걸음과 그 발자취에 고여 있는 시간의 깊이를 너무 서두르다 지나쳐버리곤 한 것 같다. 하마터면 영영 잃어버릴 뻔한 그 의미들이 아쉽고 그리워서 이제 나는 조심조심 삶의 매순간들을 경탄과 감사로 맞고자 한다. 그리하여 시간의 깊이를 달이고 졸이어 존재의 맛을 찾아내는 연금술사로, 인생의 달인으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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