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V는 미국의 수도권, 다시 말해 D.C., Maryland, Virginina 의 줄임말이기도 하지만 Department of Motor Vehicles의 약자이기도 하다. 한국으로 치면 도로교통공단과 차량등록사업소를 합쳐놓은 곳인데,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느리고 불친절하기로 아주 악명이 높다. 오죽하면 'DMV에 다녀왔어요', 'DMV 가는 날이네요' 등 제목이 달린 글이 올라오면 위로하는 댓글이 주루룩 달릴까. 하지만 미국에 정착하려면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기관이기에 나도 두 번방문해야만 했다.
첫번째는 자동차 등록과 운전면허 교환을 위한 방문이었다. 조금만 늦게 가도 줄이 길어지고 대기시간도 그만큼 늘어난다는 얘기에 오픈 시간보다 30분 일찍 찾아갔는데도 이미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기껏 기다렸는데 서류 미비로 퇴짜 맞을까봐 전날 밤부터 구비 서류를 얼마나 여러번 살펴보고 또 살펴봤던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질문에 대비해 답변도 연습하며 오픈 시간을 기다렸다. 8월 중순이라 이른 아침인데도 볕이 따가웠다. 땡볕아래 줄 서 있는 모습이 딱해 보였던 걸까. 경비 직원이 정식 오픈 시간 몇 분 전 전에 문을 열어줬고 건물 안 대기 장소에서 차례를 기다릴 수 있었다. 하도 불친절하다는 얘기를 들어서 그런지 이런 작은 편의도 엄청 친절하게 느껴졌다.
입구 쪽에는 창구가 하나 있었는데, 방문객은 거기서 용건 별로 나뉜 번호표를 받은 뒤 안쪽에 있는 개별 창구에서 업무를 볼 수 있었다. 내 번호가 전광판에 뜨면 가서 해당 창구로 가서 업무를 보는 방식이었다. 입구 쪽 창구는 뭐랄까, 약간 관문처럼 느껴졌는데 여기에 있는 직원이 일차적으로 내가 준비해온 서류가 용건에 맞는지, 누락된 건 없는지 등을 살핀 뒤 번호표를 줬다. 만약 필요한 서류를 제대로 챙겨오지 않았다면 가차 없이 내쫓긴다. 어찌나 매몰찬지 아무리 뭐라고 설명을 해도 직원이 "Next!"를 외치고 다음 사람이 오기 때문에 번호표를 받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하는 것이다.
나도 혹시나 여기서 되돌려보내질까봐 초조한 마음으로 순서를 기다렸는데, 내 순서가 되어 서류를 내밀자 그 저승사자같던 직원 분이 대뜸 "한국인이세요?"라고 물었다. 아이고, 깜짝이야. 가차없고 매몰차보였던 분이 바로 한국인이셨던 거다. "아 네네. 오늘 자동차 등록이랑 운전면허 교환 좀 신청하려고요." 한 번에 한 가지 해결하기도 쉽지 않은데 두 가지 용건을 들이밀자니 혹시나 거부당할까 싶어 영어로 열심히 연습했는데, 연습이 무색했다. 무색해져서 다행이었다. 그 분은 서류를 간단히 보시더니 별 말씀 없이 번호표를 내주셨다. 앞사람들을 워낙 칼같이 단호하게 자르는 모습을 봐서 그런지 내게는 왠지 번호표마저도 친절하게 주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번호표를 받고 안으로 들어가니 15개? 20개? 가까이 되는 창구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이 보였다. 창구는 많았지만, 늘 그렇듯이, 사람이 있는 창구는 5개 남짓이었다. DMV 건물에 한 번 들어가면 함흥차사가 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가 사는 주는 한국과 협정을 맺은 주라 별도의 시험 없이도 한국 운전면허증을 이곳 운전면허증과 교환해준다. 다만 내 운전면허증이 유효한 것인지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한데 DMV에서 한국 대사관(DMV에서 말하기로는)에 확인을 요청하고, 답변이 오면 이 지역 운전면허증을 발급해주는 방식이다. 시차를 감안 하더라도 한국 같으면 평일 기준 하루 이틀이면 끝날 일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DMV쪽에서는 최소 2주, 최장 6주를 얘기하는데 어떤 분들은 3달이 걸렸다는 분들도 있을 정도로 지난한 과정이다. 나만 해도 딱 1달 1일이 걸렸는데 아주 양호한 축에 속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첫 방문날인 이 날은 면허증 교환 신청을 하고 앞으로 타고다니게 될 중고차의 차량 등록을 했다. 차는 지인에게 받은 것인데 지인이 소유하고 있던 차량 등록증 같은 것(여기서는 title이라고 부른다)을 가지고 가서 내 차량으로 등록 신청을 하면 내 명의의 title을 내어 준다. title에 차량 구매 가격을 적는 곳이 있는데 만약 무상으로 차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가족이 아닌 경우에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차량 구매 가격란에 gift라고 적었는데 직원이 안 된다며 줄을 긋고 $1를 쓰게 했다. 무슨 차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행정상 그렇다고 하니 그렇게 했다.
차량 등록을 하려면 자동차 검사소에서 배기가스 테스트를 마쳐야 하는데 결과는 DMV에 전산으로 자동 전송된다고 했다. 검사를 통과했다면 차량 번호판에 붙이고 다니는 스티커를 발급해주는데 이는 필수이다. 비용도 내야 하는데 1년짜리와 2년짜리가 있다. 오래된 차일수록 배기가스 테스트를 통과할 확률이 낮아지니 검사를 통과했다면 조금 비싸더라도 2년짜리 스티커를 받는게 이득이라고 한다. 1년짜리를 사면 1년 뒤 또 테스트를 받아야 하는데 그 비용도 비용이지만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면 수십, 수백 달러를 들여 정비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번호판에 스티커가 없거나 유효기간이 지난 스티커가 붙어있으면 경찰 단속 대상이 되고 벌금을 내야 한다. 미국은 교통 법규 위반 관련 벌금이 너무 세서 하라는 대로 안 할 수가 없다.
그렇게 차량 등록까지 마치고 DMV를 나오니 9시 정도가 됐다. 혹시라도 뭐 하나 잘못 될까봐 지나치게 긴장을 해서 그런가 다리에 힘이 쫙 풀렸다. 8월 당시는 미국 살이에 하나하나 적응하는 게 너무 힘들고 벅차서 하루에 미션 1개만 완수하는 것을 목표로 했는데 아침 9시에 그날의 미션을 끝내고 나니 남은 하루가 선물같고 휴가같았다. 이제 운전면허증만 2주 내로 나오면 되는데....! 위에 적었다시피 2주만에 면허증이 나오는 건 그림의 떡이고, 나는 운이 좋아(?) 한 달 만에 받았다. 그것도 사실 내가 무턱대고 DMV에 찾아간 덕분이지 그냥 기다렸더라면 두 달도 훌쩍 넘겼을 것 같다.
약속했던 가장 최소한의 대기 기간인 2주가 지나자 결과가 너무나 궁금했다. 한국에서 받아온 국제운전면허증으로 이 지역에서 운전하는 건 공식적으로 2달까지만 가능하기 때문에 입국한지 한달을 넘긴 나로서는 조금 초조하기도 했다. 면허증 교환 신청을 하고 받았던 영수증 같은 문서에 신청 2주가 넘어도 소식이 없다면 DMV에 전화로 문의하라고 돼있어서 우선 전화를 걸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전화를 받지 않더니만 자기네가 전화할테니 번호를 남기라고 한다. 번호를 남겼다. 그날이 지나도 전화는 오지 않았다. 다음날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한참 기다리니 이번에는 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상황 설명을 하니 전화기 너머로 뭔가 키보드를 탁탁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내 운전면허증 교환 status를 살펴보니 아직 한국 대사관 측에서 확인을 해주지 않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역시나였다.
그때까지 지인들 얘기를 종합해보면 DMV의 일 처리는 매우 허술하고 느려서 한국 측 기관에서는 서류 확인을 빠르게 해주는데 중간에 서류가 누락됐다든지 아니면 아예 확인 요청을 안 했다든지,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엉뚱하게 했다든지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했다. 아마도 내가 그 케이스들 가운데 하나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대체 내 신청 서류가 어느 단계에서 꽁꽁 숨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사정을 들은 또다른 지인이 자신도 1년 전 똑같은 상황이었다며 찾는 방법을 알려줬다. DMV에서는 한국 대사관에 내 운전면허증이 유효한지 묻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대사관이 아니라 한국 경찰청이고, 경찰청 교통기획과에 전화하면 내 서류가 제대로 접수됐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는 거였다. 경찰청이라니, 교통기획과라니... 한국에서 사는 동안 그런 과에 전화할 일도, 아니 그런 과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미국까지 와서 그곳에 국제전화를 걸 일이 생긴 것이다. 정말 이런 방법까지 찾아내다니 의지의 한국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고, 또 한편으론 DMV가 얼마나 허술하면 신청 당사자들이 이렇게까지 해야하는 건지 씁쓸할 따름이었다.
당장 그날 밤 지인에게 받은 경찰청 교통기획과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시차를 감안해 밤 10시쯤 전화를 걸었더니 전화기 너머로 어떤 젊은 여성 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황 설명을 하려는데 어디서부터 해야할 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저기요, 음,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음...저는 지금 미국에서 전화를 드리는 건데요. 제가 이곳 운전면허증 교환 신청을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답이 없어서요...기관에 문의하니 한국 경찰청에서 아직 회신을 안했다고 하더라고요...혹시 제 서류가 제대로 접수됐는지 확인할 수 있을까요?' 더듬더듬 장황하게 설명을 하는데 직원 분이 심드렁하게 내놓는 답변은 정말이지 놀라웠다. "버지니아세요?"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어떻게 알았지?' "아 네네." "언제쯤 신청하셨죠?" "한 3주전쯤이요." "찾아보려면 시간이 좀 걸리니까 1시 이후에 다시 전화주세요." "아 네네" 전화를 끊고나서도 어안이 벙벙했다. 나처럼 답답해서 걸려오는 전화가 오죽 많으면 마치 으레 있는 일처럼 이렇게 답변을 할까. 미국 DMV 행정처리 때문에 한국 경찰청까지 고생이구나 싶었다.
여하튼 이런 과정을 거쳐 나는 다시 한 번 DMV를 방문했고, 임시운전면허증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한국 측에서는 내 면허증이 유효하다고 확인해주었지만 DMV쪽에서 한참이나 연락 없이 뭉개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냥 기다렸다면 어쩌면 난 아직도 면허증이 수중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에서는 회신을 했는데 너희는 언제쯤 내게 연락할 생각이냐며 항의 아닌 항의하러 DMV를 찾은 날, 날 담당하던 직원이 대수롭지 않은 듯 '네 면허증이 유효하다는 확인이 돼있네. 지금 나머지 절차를 진행해 줄게.' 라며 임시면허증을 발급해주고 실물 면허증용 사진을 찍었다. 항의하려던 기세는 쑥 들어가고 열심히 하라는대로 했다. 실물 면허증은 일주일 뒤 우편으로 왔다. 면허증에 있는 사진을 보니 그 날의 그 당혹스러움이 표정에 그대로 담긴 듯했다.
구글링을 해보면 DMV에 대한 평가는 박하기 그지없다. 여러 경험담에 비하면 나는 그래도 운 좋은 케이스다. 직원들 중에는 '일일 알바생인가?'싶을 정도로 절차 자체를 잘 모르는 것 같은 사람도 있고 (두번째 방문한 날, 나를 담당했던 직원도 절차를 잘 모르는지 계속 옆 직원에게 물어가며 일처리를 했는데 그 앞에 서 있던 나는 영문도 모르고 답답+불안했다. 그런데 어쩌면 그 직원이 업무를 제대로 몰라서 그날 그렇게 순탄하게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한국인은 받지 않아도 될 운전면허 필기 테스트를 봐야한고 한다든지, 굳이 필요없는 서류를 갖고 다시 방문하라고 한다든지 하는 해프닝을 겪기도 한다. 엉뚱한 수고+추가 비용을 들이지 않으려면 가장 최근의 사례들을 숙지해서 '그건 그렇지 않다'라고 우리가 오히려 설명해줘야할 판이다. 실제로 그렇게 했더니 해당 직원이 옆 직원에게 물어보고 '네 말이 맞다'고 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나하나 정착해 나가는 과정이 너무 느리고 복잡하고 고무줄같이 이랬다저랬다 하다보니 주변 분들 중에는 큰 비용을 들여 정착서비스를 받았다는 분도 있다. 꽤나 큰 금액이라 솔직히 아깝다는 생각이 안 들 수 없지만 나처럼 좌충우돌 시간 소비, 감정 소비, 육체 노동 등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을 줄인다 생각하면 그게 오히려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다. 두 달여에 걸쳐 온 몸으로 모든 걸 한 번 겪고 나니 팔 걷어붙이고 정착서비스업에 나서볼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가까운 지인이 이곳에 온다면 하나부터 백까지 다 알려주고 싶다.
다음에는 어렵기로 소문난 SSN 발급 후기도 적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