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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첫인상은 딸기 오렌지맛 노을

70일간의 유럽 여행 (1) - 이탈리아 로마

by hye


비행기가 이륙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1. 로마의 첫인상은 딸기 오렌지맛 노을



여행의 당일이었다. 전날 부랴부랴 짐을 싸고, 점심에는 친구들과 밥을 먹으면서 인사를 나눴다. 오후 다섯 시. 공항버스를 타기 위해 집에서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렇게 큰 캐리어는 처음 사보았는데, 크기가 내 몸집만 했다. 이 28인치 캐리어는 나도 이 안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함이었다.



엄마, 나 그냥 가지 말까. 가기 싫어졌어. 항상 뭐든 잘 해내면서 직전에 지레 겁부터 먹는 버릇이 있었다. 그렇게 고대해놓고, 막상 새로운 도전을 하려고 하니 두려워졌다. 괜히 엄마한테 칭얼댔다. 그럼 취소해. 엄마의 태연한 대답에 괜히 오기가 치밀었다. 칫. 그냥 해본 말인데 엄마는 뭘 그렇게 말하냐? 캐리어를 더욱 힘차게 밀면서 엄마를 앞질렀다. F적 공감을 원했다고 나는.



처음이었다. 엄마 없이 비행기를 타는 것은. 나의 모든 해외여행은 거의 엄마와 함께였고, 누군가를 종종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내가 나를 챙겨야 했다. 또래 친구들은 종종 친구들과 여행을 가기도 했지만 나는 엄마가 나의 여행 메이트였다. 성인이 되자마자 코로나가 터져서, 혼자 가까운 곳이라도 여행 가는 것이 꽤나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처음 엄마 없이 가는 해외 여행이 혼자 가는 긴 유럽여행이라니. 떨렸다. 동행인도 없으니 이 긴장감을 나눌 사람이 없었다. 혼자 해외여행으로 냅다 유럽여행 가는 사람이 어디있어? 그게 바로 접니다. 하하.



입국장에 들어가는데 괜히 눈물이 났다. 항상 도도하던 엄마가 잘 다녀오라고 하는데, 갑자기 마음이 물러졌다. 씩씩하게 인사하고 뒤돌면서 눈물이 팽 돌았다. 엄마한테 보이고 싶지 않아서, 혼자 훌쩍거리면서 눈물을 훔쳤다. 사우디 아라비아로 가는 밤비행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문 밖을 바라보며 몸이 지상과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안녕 한국. 그렇게 한국 땅을 떴고, 상공에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8시간의 장비행은 매우 불편했다. 창가 자리를 좋아해 냅다 창가를 예약했는데, 화장실을 갈 수가 없었다. 내 옆은 한 모녀였고, 그들이 잠들어버리는 바람에 나갈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참기를 택했다. 어디서든 잘 자는 성격이라 비행에 대한 걱정은 없었는데, 생각보다 잠이 너무 안왔다. 벽에 기대어 잠을 청했으나 한쪽 엉덩이가 너무 아팠다. 엉덩이가 아파서 잠을 자지 못할 거라는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드라마라도 볼까 싶어 OTT 다운로드함에 들어갔는데 죄다 다운로드 실패가 떠있었다. 화가 나서 핸드폰을 꺼버렸다. 그렇게 뒤척이다가 겨우 잠들었지만, 불편해서 몇 번을 깼고, 정말 참지 못하겠다고 생각할 즈음 도착했다.



여덟 시간 끝에 도착한 사막의 어느 도시. 새벽이라 밖이 아주 캄캄했다. 밖에서 내려서 리무진으로 공항으로 이동했는데, 밖의 공기가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매우 뜨뜻했다. 환승의 메카로 알려진 곳이라 많은 사람들이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모여들었다. 환승은 처음이라 괜히 잘못할까봐 두 눈을 크게 뜨고 transfer 표식을 찾았고, 다행히 같이 비행기를 탄 사람의 99%가 모두 환승을 하는지 그들을 따라가면 되었다.


줄에 서서 한국인들과 수다를 떨었다. 어떤 노부부는 영국에 있는 유학하는 아들을 보러 간다고 했다. 매년 한 번씩 가는 거라 이미 익숙하다고 하시는데, 그 연령에 유럽여행의 이 먼 길이 익숙하다니 너무 멋져 보였다. 내 옆의 모녀는 파리로 여행을 간다고 했다.



리야드에서의 지루한 스탑오버는 큰 기억이 별로 없다. 잘 연결되지 않는 와이파이를 30분가량 고군분투한 후에야 겨우 연결했고, 넷플릭스를 보기 위해서 냅다 돈을 지불했는데 VPN은 차마 생각치도 못해서 이름 모를 아랍어가 둥둥 떠다녔다. 겨우 환불을 마치고 아직 한창 밤일 한국인 친구들에게 문자 답장을 남겼다. 아침이 되자 상점이 하나둘씩 문을 열었지만 볼 만한 것은 없었다.


노트북과 카메라로 가득한 무거운 가방을 짊어진 채 조금 쏘다니다가, 출출해서 샌드위치를 하나 사먹었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화폐 단위같은 건 잘 몰라서 지금도 그게 얼마였는지는 모른다. 그냥 냅다 카드를 꽂았다.



비행기에 다시 몸을 싣자마자 기절을 했다. 기내식 먹을 때 빼고는 모두 잠에 들었다. 두 번째 비행에서 기억나는 것은, 3-3의 아주 작은 비행기였다는 것, 나 혼자 한국인이었다는 것 (첫 번째 비행기에 있던 그 많은 한국인들 중 나 혼자 로마에 간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내 옆은 백인 커플이었다는 것 뿐이다.


도착하기 한 시간 전 나는 눈을 떴고, 강렬한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조금 열고 밖을 구경했다. 푸르른 바다색과 광활한 땅, 중간중간 에메랄드 빛의 구역도 있었다. 아프리카 대륙이었다. 웅장하고 난생 처음보는 모습에 입이 떠억 벌어졌다. 그리고 긴 거대한 바다 위를 지났다. 이곳이 바로 내가 그렇게 상상하고 상상하던 지중해라니. 창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서 나를 반긴 건 중국 광고였다. 전공이 중국어인 터라, 그 중국어 광고가 그렇게 반가웠다. 입국 심사대에 줄을 섰는데, 공항 후기는 찾아본 적이 없어서 공항 시스템을 잘 몰랐고, 일단 줄을 섰다. 후덥지근한 공항 내부에서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렸다. 역시 유럽의 일처리. 욕이 나왔다. 무거운 가방을 들은대다 긴 비행을 마쳐서 매우 피로한 상태였다.


짐을 찾고 출국장을 나서기 직전, 설레는 마음보다 두려운 마음이 컸다. 유럽의 소매치기 악명은 익히 들었고, 나같이 혼자 온 동양인 여자애가 만만해 보일까봐 자전거 체인에 커다란 캐리어를 묶고, 온 가방에 자물쇠를 채웠다. 스트링을 대롱대롱 단 핸드폰을 손에 꽉 쥔 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항상 정신의 일부를 빼놓고 다니는 나답지 않게, 가장 말똥하고 또렷하게 정신을 유지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은 채 문을 나섰다.



시내로 가는 열차는 무난하게 구입할 수 있었다.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 이름부터가 유럽답고 자부심이 느껴졌다. 열차에 몸을 실었지만 이미 사람으로 가득 차 앉을 수가 없었다. 혼자서 20키로 가량의 캐리어를 끌고 자리를 찾으러 다니기 쉽지 않아 보여서, 빠르게 포기하고 문 앞의 간이 의자에 앉았다. 이탈리아에 미남이 많기로 유명하다더니. 이탈리아에서 처음 본 남자는 표를 검사하던 직원이었는데, 그가 너무 잘생겨서 저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밖의 창문으로 로마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에는 한국인지 이탈리아인지 모를 거 같은 무성한 나무들만 보였는데, 시내에 들어오더니 문화유산으로 보이는 건물들과 그 주위를 돌아다니는 차량들이 보였다. 낡고 오래된 것들과 신문물의 조화. 로마답다고 생각했고, 심장이 뛰었다.



테르미니 역에 내렸다. 들은 대로 사람이 많고 정신 없는 곳이었다. 내내 공항과 비행기에 있다가 사람이 많은 곳에 오니 얼이 빠졌지만, 눈 뜨고 코 베일까 두려워서 이내 정신을 다잡았다. 겨우겨우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역 밖을 나왔다. 생각보다 더운 날씨에 땀이 줄줄 흘렀다. 어느 정도 역과 멀어지자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지도를 다시 보았는데 아뿔싸. 숙소와 반대 방향으로 나와버렸다. 다시 캐리어를 끌고 역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온 출구는 으스스하기 짝이 없었다. 추레한 차림새의 노숙자들이 가득했고, 괜히 다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발걸음을 재촉해 역 앞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그러고 들어선 골목은 더 휑했다. 담배를 피는 공사장의 의 인부들과 더러운 거리를 지나 사람없고 조용한 동네에 들어섰다. 여기가 맞나. 길거리가 한산했다. 그러다 작은 공원을 마주쳤다.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레몬색과 탁한 분홍색 건물들로 가득한 유럽풍의 거리. 사진으로만 보던 그 모습들. 정신이 확 들었다. 나 진짜 유럽이구나.



한국처럼 숙소 이름이 크게 써 있을거라고 생각해서, 그 주위를 빙빙 돌았다. 집주인한테 연락을 했더니 나를 마중나왔다. 내가 빙빙 돌아다니던 건물 바로 앞이어서 괜히 머쓱했다. 엄청나게 무겁고 거대한 문을 밀고 들어가자 나를 반겨주는 것은 해리포터에서나 보던 수동식 엘레베이터였다. 이걸 진짜 쓰다니! 사람 둘이 간신히 들어가는 좁은 공간에 캐리어를 밀어넣었다. 띵. 경쾌한 엘레베이터 소리와 함께 숙소에 도착했다.



찝찝한 몸을 씻고 나오니 내 또래의 학생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나누고 서로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다. 그 친구는 영국에서 교환학생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이었다. 그녀는 이미 로마에 며칠 있었고, 오늘이 마지막 밤이라고 했다. 그리고 근처에 맛있는 식당과 카페들을 추천해주었다.



캐리어를 정리하고 있을 때, 또 다른 여성 분이 들어왔다. 오늘 처음 오셨어요? 네! 간단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내가 유럽에 처음인 것을 듣고, 시차적응을 하기 위해서는 자면 안된다고, 혹시 괜찮으면 자기가 나가겠냐고 제안했다. 나는 그녀의 친절에 흔쾌히 수락했다. 여섯 시에 만나기로 하고, 나는 동네 구경을 나갔다.



동네는 생각보다 썰렁하고 무서웠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거리는 내가 상상한 것보다 더럽고 휑했다. 5분을 걸으면서 개똥을 세 번이나 밟을 뻔 했다. 좀 큰 길목에서 아까보다 더 큰 공원을 발견했다. 규모가 꽤나 되었다. 어린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고, 노인들이 벤치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정말 로컬 분위기였다. 여유로운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유럽의 정취에 적응하기 위해서 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유럽의 길은 내가 상상한 것과 정말 똑같았다.



아까 그 친구가 추천해 준 식당이 근처여서 방문해보기로 했다. 마침 배가 출출하던 터였다. 파스타 종류가 정말 많았는데, 나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2년 간 근무한 짬으로 아마트리치아나를 주문했다. 괜히 기분이 좋아서 화이트 와인도 한 잔 주문했다. 친절한 할아버지가 멋진 서빙 솜씨를 보여주었다. 와인은 달지도, 쓰지도 않았지만 입에 아주 잘 맞았다. 달지 않은 와인이 이렇게 맛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파스타는 내 생각과 아주 다른 맛이었다. 아주 짰고, 아주 설익었었다. 이탈리아 파스타는 처음 먹어봐서 정말 충격적이었다. 내가 아는 파스타는 다 가짜였다니. 그렇지만 나름의 맛이 있었다. 와인을 한 잔 다 마시자 살짝 취기가 올라왔고, 기분이 좋았다. 처음 온 식당의 서비스도 훌륭해서 더욱 기분이 좋았다. 할아버지 서버는 끝까지 친절했다. 내가 한국인인 걸 알고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했고 내게 카드를 함부로 대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의 친절 덕에 더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숙소로 돌아갔다.



나에게 함께 외출하자고 제안한 그녀는 나보다 언니였고, 터키와 이탈리아를 여행 중이라고 했다.J언니는 친절하게 내게 지하철 티켓을 사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이탈리아 지하철은 소매치기에 유의해야 한다는 점, 문 앞에 서면 안된다는 것, 그리고 인터넷이 터지지 않는다는 것 등등도 모두 언니가 알려준 것들이었다. 언니 덕에 로마에서의 시작이 아주 순조로웠다.



언니와 함께 가기로 한 곳은 노을 명소였다. 노을을 보기로 해놓고 숙소에서 늦게 만나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유럽은 한국보다 해가 아주 늦게 졌다. 언니와 지하철을 타고 스페인 광장 역에서 내렸다. 출구를 나오자 시내 한 복판이 나왔다. 감탄을 그치지 못했다.


영화 속에서만 보던 이탈리아의 모습이 눈 앞에서 펼쳐졌다. 내가 보았던 더럽고 으스스한 로마의 풍경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시내의 반짝거림과 번화함, 내가 생각하던 로마, 정말로 유럽에 왔다는 것이 확 체감되는 순간이었다.



언니와 까르푸에 들러서 맥주를 샀다. 오드리 햅번이 젤라또를 먹던 스페인 광장의 계단을 걸었다. 오드리 햅번은 여기서 젤라또를 먹었지만 지금은 취식 시 벌금이 있다고 했다. 비스듬한 햇빛이 기울어진 스페인 계단을 구경하면서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구불구불 계속 올라간 계단 위에서는 경이로운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핀초 언덕에서 바라보는 노을은 가히 아름다웠다. 분홍색과 주황색이 교차하는 어스름한 하늘과 그 배경으로 보이는 바티칸의 돔. 그리고 뒤에서는 멋진 버스킹 연주가 낭만을 더해주고 있었다. 우리는 사이드로 빠져 자리를 잡고 맥주를 마셨고, 피곤이 싸악 내려가는 맥주와 그 낭만에 취해 대화를 나눴다. 어떤 커플들은 진한 키스를 하면서 그들만의 낭만을 즐겼다.



어둠이 내린 스페인 계단은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까보다 들썩거렸고, 더 활기찼다. 어떤 아저씨가 멋지게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기타 선율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언니의 친절 덕에 로마에서의 하루는 아주 순탄했다. 여행의 첫 시작은 그 여행 전체의 인상을 결정하기에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여행이 내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었던 건 그 시작을 J언니가 순조로울 수 있도록 도와준 덕이었다. 핀초 언덕의 아름다운 노을을 J언니에게 바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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