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문서는 반드시 1매로 작성하여야 합니다.
공직생활 40년을 마치고 민간으로 왔으니 더 이상 공직사회에 대한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차분하게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시기에 와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용서하신다면 꼭 한마디는 하여야 할 것 같아 키보드를 잡았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공직사회의 전자문서에 대한 의견입니다.
o 공무원은 문서를 남긴다
공직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문서로 한다고 합니다. 말한 것은 없어지지만 문서는 남아있습니다.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와 표범은 가죽을 남긴다고도 합니다.
虎死留皮(호사유피), 인사유명(人死留名)라는 말은 중국의 무사가 속담을 인용한 말이라고 합니다. 이후에 표범의 가죽이 아름답고 호랑이 가죽이 값이 비싸므로 표사유피(豹死留皮)라고도 했습니다.
인사유명 호사유피에 부연을 달아 ‘공무원은 문서를 남긴다’라는 말을 제가 만들어 보았습니다. 억지로 만든다면 공퇴유문(公退劉文)이라고 할까요. 공무원으로서 마지막 받는 문서는 ‘명예퇴직 발령장’이었습니다.
공무원을 하면서 수많은 말을 하고 회의에 참석하였지만 이제 남은 것은 오직 文書(문서)뿐인가 생각합니다.
o 싸인펜 결재에 대한 로망
어느 창의력 책에서 보니 부서원들은 팀장이 제목만 보고 결재를 하는 상사에게서 힘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특히 문서 위에 휘갈겨 돌아가는 만년필의 종이 긁어내리는 소리에 용기를 얻는다고 합니다.
7급 공무원을 하면서 언젠가 사무관이 되면 검정색 싸인펜이나 굵직한 만년필로 멋들어지게 결재 싸인을 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했습니다만 정작 사무관이 되니 기안책임자이고 과장님, 국장님께 결재를 받아야 하는 팀장 보임을 받았습니다.
이후에 전결권자 과장이 되었지만 이미 모든 문서가 전자로 처리되므로 마우스 결재시대를 맞이하였으므로 싸인펜을 쓸 일이 없고 내용을 수정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30년을 기다린 멋드러진 싸인펜 결재에 대한 로망은 물거품, 泡沫(포말)이 되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젊은 시절 어깨너머로 배운 컴퓨터 키보드와 마우스를 통해 결재하였습니다.
다른 의견이 있어도 쉽게 표현하기 어려우니 그냥 넘어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담당자는 계장과 과장이 결재를 하였으니 그 내용을 다 이해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전자결재가 행정적 편리성을 증진시킨 것은 맞지만 내실있는 의사결정 과정을 수행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관선 도지사 시절에는 결재하시는 도지사의 숨소리조차 기억하는 예산담당관이 예산계장님과 사업비
최종 금액을 9억으로 할 것인지 6억원 정도로 줄일 것인지를 판단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당시 도지사께서 수 천건 예산을 결재하시면서 ‘(가칭)적극市’시 9억에서는 힘이 났고 (가칭)소극市 9억원은 조금 목소리 톤과 숨소리가 약했던 것 같다면서 소극시 예산을 9→7억원으로 감액(△)하시는 상황을 목격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른바 ‘숨소리 결재’가 전자결재로 인해 불가능해졌습니다. 상사로서 눈을 마주하면서 ‘김 주무관!!! 수고했습니다’라며 시원스레 결재를 하는 그런 모습은 사라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요즘 SNS처럼 좋아요를 10개 누를 수도 없습니다.
요즘 코로나19로 더더욱 대면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만 중요한 결재사항도 이미 오래전부터 비대면으로 진행되고 있는 점은 공직사회에서 안타까운 일면이 되었습니다.
[아산사회복지재단자료] 정주영 회장에게 기자가 질문했다. 회장님은 정말 바쁘신 것 같은데, 어떻게 그 많은 서류를 검토하고 결재 하십니까? 그러자 정주영 회장이 답변하였다. 서류를 검토하기는 뭣을 해. 나는 서류보고 결재하지 않아. 결재 받으러 오는 사람을 보고 결재해. 특히 돈과 관련된 결재는 그 사람의 눈을 봐.
o 결재권자가 살펴야 할 부분
문서에 대한 결재는 결재권자가 판단하실 일이니 별도 의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만 한 가지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1건1매를 지키자는 것입니다.
문서의 내용에만 집중하다 보면 ‘나무는 보았으나 산을 놓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즉, 문서가 1매인지 2매인지를 늘 살펴야 합니다.
전자문서가 2매로 작성할 수 밖에 없는 문장의 양이 있을 것입니다. 첨부로 하지 않고 본문에서 할 말을 다하는 경우라면 2매도 가능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의 수많은 전자문서 중에는 조금만 신경쓰면 1매로 완성되어 제목과 본문과 발신자가 1매의 종이 무대위에 올릴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문은 앞장에 있고, 발신기관명은 뒷장에 있는 공문서를 자주 보입니다. 기안자나 결재자가 조금만 신경쓰면 1매로 완성되어 문서를 받는 기관도 편리하고 종이도 절약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안하고 결재한 공문서를 3년, 10년 동안 후임, 후배 공직자들이 보게 되고 永久(영구)문서인 경우 자자손손 이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오늘 기안하고 지금 결재하시는 문서에 대하여 한 번 더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o 전자기안할 때 유념하실 사항
전자로 작성한 문서를 전자결재시스템에 올려서 결재를 진행하게 됩니다. 이때 첨부물이 들어가게 됩니다. 전자결재를 상신하기 전에 첨부할 파일은 반드시 첫페이지에 커서를 두고 한번 저장단추를 크릭한 후에 결재를 올려야 합니다.
결재권자가 첨부된 파일을 열면 기안자가 저장한 페이지가 나오게 됩니다. 이때 마지막 페이지에서 저장한 경우 결재권자는 파일의 끝 페이지를 본 후 다시 첫 페이지로 이동해야 합니다. 개운하지 않겠지요. 그럼 이 결재건은 반송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전자결재 초기에 경기도청의 남기명 기획관리실장님이 8개 부서의 전자결재를 설명없이 반송하였고 여러 공무원들이 연구 검토한 결과 첨부파일의 끝 페이지 열린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후 경기도청 전체에 이 같은 내용을 설명하는 게시글이 올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