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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석 Jan 30. 2024

박갑순 계장님 순직

언론인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니 공무원으로서 모시고 근무했던 계장님을 선배님이라 존칭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1988년 임사빈 경기도지사 재임시에 저는 세정과에서 문화공보담당관실로 발령을 받아 언론인에게 행정업무의 홍보 자료를 기사문으로 작성하여 전달하는 이른바 "아이템 담당자"로 일했습니다.


  


이 자리는 누구의 결재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자료를 받아 자료를 작성한 후 기자실에 배포하면 다음날 석간에 그 자료를 바탕으로 한 기사가 인쇄된 신문으로 읽을 수 있도록 하는 아주 재미있게 일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 오전 10시 도지사님 주재의 간부회의시에는 상황실 뒷 편에서 오디오를 청취하던 중 의미있는 말씀이 나오면 간단히 메모한 후 지방 신문사 기자에게 전화로 알려주면 원고지 1매 이내의 가십기사가 오후 2~3시경 윤전기를 통과하는 석간신문에 실리니 이 또한 밤나무 아래서 3개 또는 2개의 초콜릿 알밤을 줍는 기분입니다.


취재와 기사 보도과정이 1:1로 마감되는 것이 공무원 초짜(공무원 11년차)로서는 얼마나 신명나는 일이겠습니까.


특히 당시의 임사빈 경기도지사로 말씀드리면 정말로 '입지전적'인 인물로서 양주군에서도 본 양주에서 출생하시어 젊은 시절 내무부에서 일했고 야간대학을 다니고 꾸준한 노력을 거듭한 결과 30년 만에 9급에서 1급 도지사에 이른 분입니다. (지금 도지사는 차관급, 부지사 1급)


민선 경기도지사 출마에서는 낙선하였지만 양주·동두천 국회의원을 하시면서 경원선 전철 유치에 심혈을 기울이신 분입니다. '임두목'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굵직한 일을 추진하신 분입니다.


특히 내무부 근무시절 공보관을 하신 이후 국장으로 승진하셨을 때 기자들이 한동안 공보관실은 가지 않고 임사빈 국장실에서 진을 치고 기사 아이템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30년 동안에 9급에서 1급에 이르려면 3년마다 승진을 하셨다는 계산이니 이 또한 얼마나 바쁜 승진과 자리이동을 하셨을까요.


하지만 임사빈 도지사님도 공무원이니 언론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던 숙명일까요. 1989년 하반기에 정부에서 관리하던 골프장 인허가 업무를 시행령을 개정하여 시도로 위임하게 되었고 경기도청 관광과에서는 당시 중앙으로부터 진행 중인 골프장 서류를 덜렁 인계받았고 곧바로 관광과에는 사업승인을 받기 위한 회사 간부, 설계회사 직원, 기타 로비스트들이 줄을 잇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업무를 담당한 C선배는 현직 J선배와 과거 D시 부시장을 하신 선배등과 함께 이 업무를 하면서 새벽부터 늦은 시각까지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공평하게 일처리를 잘 마친 결과 정년퇴직하셨고 마지막 선배도 명예퇴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들 세분은 최근에도 모임을 갖고 그 당시를 회고하시며 자랑스러운 공무원으로서의 자긍심을 되새기신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방언론에서 시작된 경기도청의 골프장 사업승인 건에 대한 비판은 중앙지와 방송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최근 수년전에도 국감에서 국회의원들이 김문수 경기도지사님에게 골프장 사업승인 건수가 많다는 비판을 하였습니다만, 국회에서 의결한 법에는 광역이든 기초든 자치단체장이 골프장 사업을 제한할 정책결정권은 주지 않았습니다. 서류를 준비하고 절차를 진행하면 골프장은 건설되는 것입니다.


당시에도 그러했을 것입니다만, 결국 정부에서 시작한 골프장 사업승인 서류가 경기도에서 마무리되자 이 책임의 화살들이 임사빈 경기도지사에게 날아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더구나 당시나 지금이나 언론사 데스크는 다른 언론 보도내용을 보고 주재기자, 출입기자의 기사보고가 없으면 이른바 새처럼 "쪼아대는" 시절이었으니 1988년 당시 출입기자 30여명이 일주일 동안 경기도가 골프장을 과다하게 허가한다는 기사를 너도나도 쓰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중앙지 漫評(만평)란에 경기도 골프장에서 드라이버샷을 하니 그 골프공이 지구를 한 바퀴 돌아와서 도지사의 벼슬 감투를 때려 떨어트리는, 당시 공무원으로서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그림이 올라온 것입니다. K신문 G차장이 올린 기사를 바탕으로 화백께서 의미를 담아 붓펜으로 일갈 하시니 임사빈 도지사께서 심히 마음이 불편하시게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J일보 K기자가 토요일 오후에 본사로 골프장 기사를 송고하려 하자 B계장님과 L차석이 팩스기를 가로막고 저지하려 하였지만 결국 송고되었고 월요일에 4단 정도의 세로쓰기 기사가 난 것이 마지막인 듯합니다.


결국 "경기도 골프왕국"기사는 온통 신문을 장식하고 덕분에 방송기자도 드라이버 날리고 퍼팅으로 108번뇌(홀컵 지름이 108mm)하는 영상과 함께 전국 방방곡곡에 보도되었으니 온 나라 국민들이 골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을 것이고 골프업계 종사자들은 신바람이 났을 것입니다.


108번뇌란 골프 퍼팅하는 홀컵의 지름이 108mm인데 이는 100여년전 영국에서 치과의사가 토끼 굴에 퍼팅하는 것으로는 심심하여 주변에서 소재를 찾던 중 짧게 잘린 수도관을 발견하고 이를 땅에 나무 심듯 묻은 후에 퍼팅을 하니 어렵지만 재미있어 이른바 시험에서 말하는 "辨別力(변별력)"이 커져서 그리 정했다고 합니다.


이분 치과의사가 당시에 좀 더 큰 300mm 수도관을 집어 들었다면 전 세계의 골퍼들이 얼마나 행복할까요. 물론 108mm에서 아놀드퍼머, 구옥희, 최경주, 타이거우즈, 박세리, 신지애, 최나연이 나타났고 오산시 7세 어린이의 홀인원이 인터넷에 크게 보도된 것이겠지요.


이렇게 낭만적인 이야기만 들으실 때가 아닌 줄 압니다. 결국 골프장 보도사건은 당시의 선배공무원이 낮으로 밤으로 언론인을 접촉하면서 이른바 '보도 막기'에 고생을 하신바 피로와 스트레스가 축적되었고 그해 12월말 출근길에 쓰러지시고 곧바로 수원시내 병원에서 긴급 조치를 받으시고 경희의료원 중환자실에 입원하셨으나 다음날 다시 수원 병원으로 돌아오시게 됩니다.


엠블런스에서 내린 선배를 병실로 안내하고 손을 잡고 이마를 짚어보니 냉냉하고 맥도 희미하여 가슴이 먹먹하였고 결국 12월30일에 별세하시고 다음날 종무식 참석이 아니라 도청장 영결식에 이어 성남 공원 묘원에 모시게 된 것입니다.


꼭 슬픈 날에는 날씨조차 더더욱 추운가요. 아니면 춥게 느껴지는 체감온도의 차이일까요. 오전에 도청광장에서 道廳葬(도청장)을 거행하고 장지에 모시고 돌아오니 저녁 7시쯤 되었는데 당시 교육을 앞두신 공보관이 사무실에 술상을 차려놓으셨습니다. 장지에 다녀온 후배들 고생했다고 격려하시는 자리입니다. 여기서 사건이 일어납니다.


출입기자 중 한 분이 늦은 시각 기자실에서 공무원들에게 뭐라 하신 말씀을 제가 취중에 잘못 이해하였나 봅니다. 계장님이 순직하였는데 장지에 함께 한 출입기자는 2명뿐이었습니다. 평소에는 그리도 친밀해 보였는데 말입니다.


마음이 울컥하여 기자실에 뛰어들어 입구의 표찰을 파손하고 기자실내 원고지와 기타 서류를 마구 집어던지는 사태에 이르렀습니다. 책상유리가 깨지고 기자실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11년차 어린 공무원이 과도하다 반성을 합니다만 당시에는 소주가 25도로서 지금의 물 같은 19도와는 크게 다르므로 취하는 정도가 달랐다고 변명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공직에서 계장님은 부모님과 가족 다음으로 자주 만나고 가까이 모시는(당시에는 모신다 했음)분이니 부모 돌아가신 상주로 생각하고 주변에서 다독이고 본인도 자중해야 하였습니다.


결국 다음날 새벽잠에서 깨어나니 동료들과 마지막 소주집인 소골집(지금 수원 세무서 건너편 버스정류장 옆)에서 가로세로 섞여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12월31일과 1월1일밤 사이의 긴 시간을 소주집 식탁아래서 보낸 것입니다.


가까스로 몸을 챙겨 일어나니 안경이 오간데 없고 결국 버스타고 집에 가서 샤워만 하고 오전 10시에 사무실로 출근하여 어제 받은 부의금을 정리하였습니다.


다음번 공보관에 내정되신 H국장님이 11시경 오셨습니다.


국장님! 저는 이제 공무원을 그만 두어야겠습니다.


왜 그러느냐?


어제 밤에 기자실 간판, 책상, 유리, 원고지, 서류를 제가 저 지경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저는 기억이 날 듯 말듯 한데 제 짓인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 네가 기자실을 저리 했느냐?


예 그렇습니다.


그래 참 잘했다! 더욱 더 열심히 하자.


결국 월요일 오전에 회계과 직원들이 긴급하게 응급복구를 하였고 이후 사고뭉치 공무원은 무난하게 2년반 근무를 마치고 승진하여 다음 부서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연말이 되면 당시 고생고생하시다 별세하신 선배님의 기억이 납니다. 사모님이 L대학교 메이퀸이라 자랑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친구!!! 고통과 번뇌가 없는 그곳에서 영면 하소서"라고 영결사를 읽어가시던 또 다른 L선배님이 생각납니다. 그 L선배님의 사위가 된 K사무관과는 가끔 만나 수원 역전 순대국 집에서 소주를 함께 합니다.


역사와 세월은 힘들어도 이어지는 것이고 기뻐도 함께 하는 시간의 흐름으로서, 인간이 거스르지 못하는 대 우주의 질서인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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