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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여래불과의 인연

by 이강석

중추절 추석에 차례를 지내고 점심을 먹은 후의 귀가 길입니다. 석모대교를 건너 우회전을 해야 하는데 차가 많이 밀리기에 구경도 하겠다는 생각에 반대방향으로 우회전하여 이리저리 방황을 하면서 가을이 무르익은 강화도 본섬의 경치를 玩賞(완상=즐겨 구경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우회하여 도착한 곳이 서포리 선착장인데 좌회전해야 하는 사거리에서 차량이 몰리는 바람에 직진방향으로 내몰리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운명이 전혀 모르는 이와 전생에 인연이 없을 듯 보이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기도 하나 봅니다.


직진하는 바에는 김포시 방면으로 가면 오히려 교통체증이 덜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달리는데 역시나 네비양이 좌회전을 명하므로 가다보니 이 길이 대략 강화읍 소재지 방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에서 운명의 4인을 만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젊은 부부 2인이 그냥 잠시 제집에서 큰집에 마실 가는듯한 행장이기에 지나쳤는데 50m 거리에 60대와 10대 조손이 걸어가므로 차를 멈추고 어디까지 가시는지 태워드리겠다고 말했습니다. 차는 좁은 길에 외통수로 정차했는데 차문을 열어 잡고는 뒤편 젊은 부부를 부릅니다. 아들과 며느리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4명을 차안에 가득 태우고 건넛마을 2km정도 가는 줄 생각하면서 찬찬히 차를 몰았습니다. 전에 들은바 모르는 이를 태웠다가 교통사고가 나면 온통 다 책임을 져야하고 보험에서는 전혀 책임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부득이하게 태워야 하는 경우에는 ‘교통사고에 대해 책임지지 않겠다. 사고가 나도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태운다’고 말해야 한다고도 합니다.


세상 참 살기 어렵게 변하고 있습니다. 나그네가 냉수 한 그릇 얻어먹기 어려워서 패트병에 생수를 들고 다니는 나그네와 여행객을 보아도 역시 안타깝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서 평소에도 느린 차량 운행이 더더욱 소심해지고 차분합니다.


차를 운전하면서 승객들이 뻘쭘할까 생각이 들기에 한분한분 자신을 소개해 달라는 주문을 하였습니다. 앞좌석에 앉은 어머니가 대변인이십니다. 뒷좌석의 아들은 좋은 말만 하고 그 아내, 즉 앞좌석 아주머니의 며느리는 말을 삼가고 있습니다. 결국 모든 이야기는 모자가 담당하는데 슬쩍 던진 불교 이야기에 동네에 있는 새로 지은 사찰 이야기를 장황하게 이어가십니다.


건너편 마을쯤에 내리실 것으로 생각하고 하차지점을 말씀하시라 하니 인천에 사시는데 광역버스를 타려 한다고 하십니다. 그럼 강화터미널까지 모시면 되겠습니다. 순간 김포 버스터미널을 생각했지만 한 번도 가본바 없으므로 전에 한번 어머니 시장 보러 오신 날 들러서 모시고 석모도 집에 들어갔거니와 평소에도 늘 스쳐 지나가는 강화터미널까지 모시기로 합의를 했습니다.


운행거리가 길어졌으니 대화의 꼬리도 늘려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세상 살아온 이야기, 책을 써본 스토리, 그리고 108배를 통해 얻는 참 좋은 분위기로 이야기의 레벌업 되었습니다. 어제 보문사 눈썹바위 마애불 앞에서 무려 절을 하였으므로 오늘 네 분의 좋은 인연을 만나 동행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정도면 어느 주지스님의 설법 수준이겠습니다. 모든 만남과 함께 함을 불가의 인연으로 풀어내는 화법이 세속에서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니 말입니다. 말을 하면서도 내가 이런 말을 하여도 되는 것인가 돌아보기도 하였습니다만 다시 보면 전혀 예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만난 분들과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운명이고 화두가 아닐까 짐작해 보았습니다.


드디어 강화읍 버스터미널에 내려드리고 편안한 여행되시기를 바란다는 인사로 작별했습니다. 운전자 바로 뒤에 앉아서 나의 체육복 상의를 깔고 앉아있던 15살 정도, 중학교 3학년으로 짐작되는 똘똘하게 생긴 손자에게 그 쪽문은 위험하니 잠시 기다려 차례로 내리라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차문을 닫고 차를 운전하여 김포방면으로 향할 즈음부터 그 15살 중학생을 머리에 떠올렸습니다. 오늘 나의 차 태워주기가 저 학생의 마음속에 나라를 위한 봉사의 정신이 충만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오늘의 이 작은 물결이 15살 중학생의 마음속에 대한민국 보건복지부장관의 꿈이 키워지기를 바랍니다.


돌이켜보면 15살 때 동네 아저씨와 택시를 타고 읍내에서 집까지 왔습니다. 동네에 아프신 분이 있어서 병원에 모시기 위해 수원까지 나가서 택시를 대절하여 시골로 가는 큰 돈 들어가는 운행 중이었는데 조금 늦게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걸어가던 길에 택시를 탄 동네 아저씨를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동네까지의 중간지점에서 우리 동네 최 연장자이신 심응섭 할아버지를 만났고 청년은 기사님의 양해를 얻어 심 할아버지를 태워 동네 집 앞에 내려드렸습니다. 당시 차를 타고 달리면서 내가 훗날에 차를 운전하게 되거나 자가용을 타게 되면 지나가는 사람을 반드시 태워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차를 태워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1983년 12월 말 아주 추운 날에 우리부서 송년 회식에서 술한잔 하고 선배를 집으로 모신다는 것이 오히려 취해서 길을 잃고 허둥대다가 길가에 쓰러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 두 사람을 젊은 자가용 청년이 태워서 집까지 배달해(?)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주머니 속 이강석의 주민등록증의 주소지로 가서 밤 12시에 5층짜리 연금공단 아파트 주민 아홉집을 모두 깨웠고 시골 선배형이 저와 선배를 4층 방으로 올려 보냈다고 합니다. 3층 사모님이 자가용 차번호를 기억했다가 잊었다고 하십니다. 주취, 만취된 두 사람을 배달한 청년에게 이 사람이 정신 차리면 예를 갖춰야 하니 연락처를 달라 했지만 그냥 ‘辭讓(사양)’하셨다고 합니다.


이후에 동두천시청 근무시에 길바닥에 누워 자는 피투성이 청년을 씻겨서 살펴보니 어제저녁 무전취식으로 인해 폭행을 당한 듯 피를 흘린 상태로 밤새 길에서 자고 아침에 발견된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 또한 나에게 지난날의 은혜를 대신 갚으라는 이른바 ‘내리 사랑’의 일부라는 생각으로 차비를 주어 보냈습니다.


의정부 경찰서에서 전화를 걸어와 가보니 이 청년이 또다시 무전취식이라 보증금을 내고 인후보증을 서주어 빼낸 후에 차비를 주어 집으로 보낸바 더 이상 연락은 없습니다. 두 번이면 조금은 깊은 인연을 마감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후에 양주시 남면에 거주하는 목부 아저씨를 구해서 집에 데려다 주었는데 가는 길에 목이 말라 생수를 사러 가자 자신은 “환타! 환타!”하면서 음료수를 구체적으로 지정하는 바람에 동행한 사무장이 크게 웃었고 이후에도 만나면 그날을 회상하며 또 한번 함께 미소짓고 있습니다.


어느 날 민원실에 들어온 예비군 복장의 아저씨가 ‘우리 동네에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있는데 동사무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질책을 하시므로 무엇을 도와드려야 하는가 물으니 라면 한 상자를 달라 하십니다. 가게에 동행하여 라면 1박스를 집어 들게 하고 값을 계산하고 돌아서니 이미 사라졌더라구요.


이리저리하여 40년 공직에서 일하며 몇 가지 좋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이번 중추절에 보문사 마애불 앞에서 540배 절을 한 효과로 네 분의 보살을 만났고 10여 km를 달려 강화읍 버스터미널에 내려드렸던 바 이분들이 바로 ‘藥師如來佛(약사여래불=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에서 구원해 준다는 부처)’로서 중생의 세상에 오셔서 잠시 불심을 점검하고 전파하심이 아닐까 생각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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