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정산

by 윤선우

머무른 것도, 떠나온 지도 고작 며칠이나 되었다고. 어느새 내 침대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향수병이다.


거진 1년 반 동안 돈을 모아 대학생 치고는 길고, 넉넉한 여행을 다녀왔지만 준비하는 동안 이 오랜 설렘 덕분에 살아온 게 아닌가 싶었다. 그 탓일 거다. 여행을 다녀온 직후에, 우스갯소리로 이제 죽어야겠다는 말을 하고 다녔지만 내뱉으면서 반의 반 정도는 진담 같기도 했다. 많이 무기력했나 보다. 또다시 목표로 삼고 버텨낼 수 있게 해 줄 곳을 가까운 시일에 박아두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리고 지금. 그래도 여행에 대해 적어야지, 써야지 하다 보니 여기까지다. 오래 돼버린 이야기를 이제는 적어야겠다는 그 조급함도 결국 오래되어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야 하는 게 내 일이다. 소중한 것을 마냥 오래되게 두지 않는 일. 피로한 책무다.


절대 볼 수 없을 것만 같던 영화나 드라마의 속편들이 속속히 개봉하고 있다. 언제쯤 볼 수 있을까 싶은 기다림에는, 결국 볼 수 없을 것 같은 불안도 있었던 거 같다. 그러나 그런 불안을 안심시키듯 기다렸던 모든 이야기의 후일담들은 약속한 제때에 개봉하고 전해진다. 그래서 이젠 뒷이야기들이 기다려지진 않는다.

여전히 많은 것들을 기대한다. 그러나 기다리지는 않는다. 나름대로 기대와 기다림의 차이를 정의한 데에서 온다. 예전엔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불안함에 많은 걸 그르친 것 같은데, 이젠 지금보다 앞서 있는 약속들에 대해 조급해하지 않는다. 그래서 전만큼 간절하지도 않다. 많이 변했다. 내가 해오던 기대도, 이젠 오래 돼버렸다. 계속 주시해야 한다. 짜게 식어 이젠 중도가 돼버린 이 감정이 영 좋지만도, 싫지만도 않으니 말이다.


비행기 티켓은 진작 3월에 끊어두었다. 유럽이라는 먼 곳으로 향하는 데에 있어 많은 걱정이 있었다. 진짜 갈 수나 있을까. 그 먼 곳을, 남 일 같던 행동, 장소들이 심하게는 실존하는 지부터 의구스러웠다. 그러나 고작 비행기 티켓이었다. 성인으로서의 어떤 거창한 절차를 거쳐야만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돈만 어떻게 모이니 집에서 주기적으로 사는 포마드만치 쉬운 일이었다. 어른이 되면서 생각이 깊어진 줄 알았는데, 그냥 생각이 많아진 거였다.


21시간이라는 비행시간도 까마득하게만 느껴졌지만 막상 탑승하 고나니 시간은 비행기와 같이 무섭게 속력을 냈다. 고등학생이 되기 이전, 그니까 수면을 제때 자던 시절의 윤선우는 잠든 시간을 까마득히 긴 시간으로 여겼다. 그 어떤 커다란 것이 기다리고 있어도 밤을 새운다는 행위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간임과 동시에, 그 오랜 시간만큼 무언가를 노력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양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근데 지금은 꼬박 새도 모자란 일들 뿐이니, 21시간 따위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슬픈 일이다. 시간을 가벼이 느끼게 만드는 능력. 얄팍한 재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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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사람을 외롭게 한다. 결단코 서울에 살고 싶지 않다고 늘 다짐한다. 분당과 동천엔 여전히 탄천이 있고, 집들이 가깝고, 사람들이 만연해있다. 그래서 나란 사람의 영역은 고여 있고, 학교는 적응이 어렵다. (여러모로 미안하다)

한가로울 때면 수평적인 곳을 찾아 헤맨다. 두 발로 서서 사람을 마주할 수 있는 곳, 어색하더라도 모르는 이와 눈이 스치나마 마주칠 수 있는 곳. 항상 공간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몽마르트르 언덕에서는 민준이와 병맥주를 까마신 적이 있다. 핸드폰을 보기보단 북적이는 이들을 바라본다. 더 재밌다. 예로 한 페르시아계 커플의 청혼을 눈앞에서 관람했다. 너무 눈앞에서 본 지라 내가 프로포즈를 받는 줄 알았다. 꼭 프로포즈가 아니더라도 다른 삶들을 보다 가까이에서 마주한다. 그게 가벼운 인사든, 목격이든, 시비던 간에, 너와 내가 같은 선에 서있다. 더 귀 기울일 수 있다.


여전히 서울은 사람을 외롭게 한다. 부쩍 제비다방을 많이 찾는다. 수직이더라도 서로의 시선을 위해 난간에 구멍을 뚫어놓은 걸 볼 때면 그깟 구멍에게서 서울에 없는 다정함을 느낀다. 그 구멍을 통해 아래층을 오래 바라본다. 어쩌면 그 구멍에서 그날 봤던 언덕을 엿보고 싶은 욕심이다. 모두가 조금 더 멍청해졌으면 좋겠다. 그 구멍을 오래 바라보고, 가끔 눈이 마주치면 주저없이 인사하고. 때를 놓친 사랑은 재난일 뿐이니 말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영화를 하지 않는다면, 혹은 오랜 시간이 흐른다면 사람들에게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다. 그게 무슨 형식이 되었든, 삶을 더 가까이에서 바라보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곳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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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모든 일에 지혜로워지고자 부단하다.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정도라 생각했는데, 자꾸 스스로 부끄러워질 고비들이 찾아온다. 영화라는 작업이 특히 더 그럴 수도 있겠고, 영화라서 특히 그렇다는 내 생각 때문에 더 그럴 수도 있겠다. 올해 이 두 가지를 모두 맞닥뜨렸다. 첫째야 뭐 훌훌 털 수 있다. 각오야 쉬웠고 손 뻗는 일이야 어렵지 않으니. 요즘은 후자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태도에 대한 이야기다. 예술의 책무라기보단, 대화의 책무가 더 어울릴 듯하다. 내가 하고픈 말이 있으면, 그만큼 들어줘야 되는 것. 불변의 법칙이다. 내 하고픈 말만 내세우는 거만큼 흥미 떨어지는 이야기는 없다.


가슴 아픈 연말의 연속이다. 더 가슴 아픈 건 저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었다. 나에겐 당연히 말하기보단 더 귀 기울여야 할 시기였지만, 의문이 들 정도의 고요함이었다. 차라리 나와 반하는 생각을 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차라리 낫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해학 없이 단순 희희낙락할 주제로만 소비되고, 여전히 본인들의 할 말에 매몰되어 있는 풍경이 많이 실망스러웠다. 하긴, 그게 무관심이든 침묵이든 본인 살림살이에는 더 득일 테니까. 이해한다. 지금 세상의 대화는 운율로만 알아들을 뿐이니 말이다. 모두가 좋아하는 멜로디와 박자로. 씁쓸하지만 그러면 다들 좋아한다. 그러나 난 더 이상 당신들이 할 이야기가 궁금해지지는 않는 것 같다.


여전히 대화를 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모든 일에 지혜로워지고자 부단하다.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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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았으면 좋겠다. 나는 아무래도 늘 말하기보단 듣는 걸 더 아끼는 것 같다. 그래서 여전히 도망치기만 하는 이들의 무관심을 지독히 미워하지만, 내가 보지 못한 그 앞모습이 누추하지만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람이 상처로 성장한다 생각하지 않기에, 그럴 바엔 그냥 네가 상처 없이 자랐으면 좋겠다. 이내 성장하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실망했어도, 금방 돌아올 것들이다.


아무튼 한 해 동안 어떤 식으로든 옆에 있어주고, 이 글을 읽어준 당신들에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감사하다. 보다 덜 슬퍼하고, 더 기대할 수 있는 새해를 기다려보려 한다. 너 또한 오래되게 두지는 않을 거다.



https://youtu.be/OFv9YZ6QftM?si=CtWL17xtmnpul5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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