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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율맘 Jan 28. 2022

결혼 전에 나,

나에 대해서



 나는 1남 2녀의 막내딸이고 인심이 후한 시골에서 자랐다. 어릴 때 별명은 '악살'!

지금도 어릴 때 제가 울면 아빠가 부르던 노래가 기억이 난다.

"악살 하고 나하고 같이 놀자 ~같이 놀자"

작은 아빠께서는 내가 커서도 자주 말씀하셨다.

 "너는 어릴 때 힘들지 않게 소리만 엥~하면서 울었고 크게 아픈 곳 없이 자랐다."

이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이유 없이 그랬겠어?! 처음엔 큰 소리로 울다가 나중에 지쳐서 소리로만 울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 행동이 반복되니 그냥 울게 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어릴 때 아들이 한 것처럼...... 그리고 지금 딸이 하는 것처럼.....

 나의 어릴 때 울음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큰 엄마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너무 울었다며

 만약 자기 딸이었으면 어디 내다 버렸을 거라고 했다. 엄마가 돌아가셔서 물어볼 길이 없다. 아빠는 엄마의 육아의 힘듦을 잘 알지 못할 것 같다. 내가 애를 키워보고 남편이 도와준다고 하지만 내 힘듦을 100%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엄마가 되어보니 나를 키우며 얼마나 힘들었을까 미안하면서 고맙다. 살아계셨을 때 이 말을 전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릴 때부터 유독 예민한 아들이 심하게 울 때면 엄마 생각을 하면서 우리 엄마도 이렇게 힘들었을까? 또 참고 참으며 아이를 달랬던 기억이 난다.

 아이를 보면 내가 보인다. 밥을 잘 안 먹고 마른 아이들 보면서 또 느낀다. 내가 어릴 때 삐지면 밥도 굶고 하루도 참았는데 우리 아들은 그렇게까진 안 하니 다행이다. 지금은 하루 한 끼 굶는 것도 힘든데......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겠지....... 기억이 잘못됐나? 싶다. 그리고 어느 날 깨달아서 '굶으면 나만 손해다'라고 느낀 순간부터는 편식도 안 하고 아주 잘 먹었는데 우리 아들도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나의 어릴 적 얘기를 보면 엄청 예민했을 것 같지만 학교 생활에선 성격이 좋고 적극적인고 밝은 아이였다. 집에서 막내라 인정받지 못했던 것을 밖에서 푼 것일까? 집에서 첫째가 밖에서는 막내처럼 하고 막내들이 오히려 첫째 같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내가 그랬던 거 같다. 지금도 밖에서는 다른 사람도 잘 챙기고 주도적으로 하는 면도 많지만 집에 가면 막내로 돌아온다.  작은 학교에서 친구들과 놀기도 좋아하고 공부도 잘하고 매년 반장도 나서서 했다.  남자 5명 여자 6명이 한 반인 소규모 학교!  5학년 때는 분교가 돼서 합반도 하고 분교 1회 졸업생으로 졸업을 했다. 지금은 알록달록 학교 건물에 색을 입혀서 아주 유명한 학교가 되었고 디시 초등학교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산수는 잘했는데 독서량이 부족하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글을 쓸 때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 조리 있게 잘 말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니 연습이 많이 필요하다. 어릴 때 독서에 취미가 없었더라도 커서 독서에 매력을 느껴서 다독하는 분이 많으니 나도 희망을 가져본다. 그때는 왜 그렇게 독서가 싫었을까? 지금 마음만은 미치도록 독서만 하고 싶다.  우리 아이들도 나 같은 후회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중학교 때도 적당히 공부하고 아이들과 노는 걸 많이 좋아했다. 친구들과 함께 그 나이에 하면 안 되는 행동도 하고  그런 게 멋이라고 생각했다...... 사춘기를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나름 사춘기였나 보다. 지금 추억들이지만 부모님이 내가 한 행동을 알았더라면 어떻게 훈육하셨을까?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했을까? 아빠가 스치듯 얘기한 적이 있는데...... 내가 나쁜 행동을 할 때 뭐라고 하면 더 삐뚤어질까 봐 아무 말도 안 했다고 했다. 그 나쁜 행동의 수위를 아빠는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  아빠의 믿음을 아름답게 지키기 위해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경험한 것이 있으니 나도 우리 아이들을 믿어주고 모른 척 지나칠 수 있을까?! 현명한 엄마이고 싶다.

  놀기도 놀았지만 인기도 있어서 반장도 하고 중학교에서 공부 좀 해야 들어간다는 인문계에 진학했다. 지금은 의미 없지만 그때 당시엔 큰 의미를 뒀다. 100명도 안 되는 중학교에 다니다가 시내권에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가 보니... 우물 안에 개구리가 따로 없었다. 수학과 체육을 잘하고 나머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무슨 용기가 났는지  학급선거에 부반장을  하겠다고 자원해서 부반장이 되었다. 오래 달리기도 1등 페이스에 맞춰서 항상 2등으로 달렸다. 대학교 때도 과대는 안 하고 부과대로 활동했다. 할 거면 반장, 1등, 과대를 하지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속한 그룹에 힘은 되어 활동하고 싶은데 주도하고 싶진 않고 잘 따르고 도와주겠다는 마음이다. 편하게 사는 길을 택한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면 또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한 것 같지 않다. 내 삶의 주인은 나인데 내 소신대로 살기보다는 주변 의견을 따르며 살아간 것은 아닌지... 너무 타인을 배려하고 나를 학대한 것은 아닌지... 지금부터라도 바뀌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나는 소신이 없는 아이였던가?!

 고등학교 가서 2학년 때 인문반과 자연반을 선택해야 할 때에도 내가 처음 생각한 대로 하지 않았다. 수학을 좋아해서 자연반 가야지라고 생각하고 언니한테 말했는데 언니의 한마디에 인문반을 택했다. 언니의 말이 진리인 것처럼 바로 수긍해버렸다. "너 물리랑 화학을 잘할 수 있겠냐?"라는 자신이  없어졌다. 언니가 똑 부러지고 공부도 잘해서 기가 죽었나 보다. 그때 그냥 자연반에 갈걸… 가끔 후회를 한다. 다시 돌아가면 물리와 화학을 못해도 자연반을 택하겠다. 왜냐면 나는 수학을 진심으로 좋아했으니까! 수학을 더 깊게 배워 봤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지금은 덧셈도 암산으로 못하고 한참 생각해야 나오는 지경이지만…… 전에는 전화번호도 잘 외웠는데 이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 머리가 굳어버린 것 같다.

  대학교를 선택할 때도 윤리 교육과에 지원했다가 떨어져 대기하고 있었는데 오빠가 다니는 과에 지원해보라고 했다. 그래서 나의 진로는 결정됐다.  그때 당시에 전문대에서 제일 높은 커트라인을 갖고 있는 과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나는 참 내가 속한 환경에서 만족감을 느끼면서 사는 것 같다. 무서운 학과장님 지도하에 고등학교 같은 생활을 했다. 알바 금지! 동아리 금지! 친구들과 동아리 들었다가 들켜서 단체 기합 받은 사건도 있었지만 재밌었다. 그 틀 안에서 규칙을 지켜가며 안정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대학교 때 누릴 수 있는 캠퍼스 커플도 해보고 술 마시며 밤새도록 많이 놀았다.

 국가고시에 합격하자마자 교수 추천으로 바로 취직을 했다. 초년생일 때엔 배움의 욕구도 커서 스터디 모임도 참석하고 학회도 참석하고 새벽에는 수영과 어학원도 다녔다. 스터디 모임에서 알게 된 선생님들과 연결되어 협회에서 총무부장, 재무이사도 하고 그 직책이 버거워 결혼을 핑계로 협회 생활을 끝냈다. 버거운 직책이라 함은 마지막 술자리까지 남아서 돈을 정산하는 일이었다. 나의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과 시키면 시키는 대로 잘하는 성격이 직책을 맡는데 한 몫했다.

 나의 성격은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하며 착하다. 다른 사람들과 논쟁이 없고  따른다. 뭐든  수용한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밝다. 예의가 바르다. 등등…  결혼 후의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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