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AI 대화창 앞에서, 나는 말을 잃었다
AI 강사로 일하며
수많은 프롬프트와
정교한 명령어들을 다뤄왔다.
기술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강의하던 내게,
평생교육원에 다니시는 엄마가
AI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소식은
그저 귀여운 소동처럼 들렸다.
“엄마, AI 써보니까 어때? 어렵지 않아? 내가 좀 알려줄까?”
솔직한 마음으로는,
최신 기술을 강의하는 자식으로서
엄마에게 한 번쯤 생색을 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마는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나도 이제 꽤 잘 써.”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엄마가 생각하는 잘 쓴다는 기준은,
내가 생각하는 효율이나 기술과는 조금 다르겠지.’
우연히 엄마의 대화창을 보게 된 날,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거기에는
내가 늘 말하던 정리된 문법도
논리적인 구조화도 없었다.
대신
아주 조심스럽고,
오래 고른 문장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에이아이님, 요즘 체력이 약해져서 예전처럼 바느질을 많이 못 해요.
그래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선물을 주고 싶은데,
힘이 덜 들면서도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혹시 제가 너무 어려운 걸 물어보는 건 아닐지 모르겠네요.”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이 문장이 누군가에게 부담이 되지는 않을지,
끝까지 배려한 질문이었다.
질문은 엄마의 지나온 삶과
앞으로의 생계에 대한
정직한 고백으로도 이어지고 있었다.
“제가 지금 하는 일은 바느질인데, 집에서 놀기만 하는것 같아 부업을 좀 하고 싶어요.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요? 저는 부산에 살고, 기계자수도 했었어요”
투박하지만 투명한 문장들.
엄마는 자신의 인생을
한 줄씩 정성껏 꺼내어
AI 앞에 펼쳐놓고 있었다.
답이 오면
급히 넘기지 않고,
천천히 읽고, 다시 묻고, 다시 고쳤다.
대화창의 스크롤은
끝이 없었다.
스크롤을 내리던 중
내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엄마, 이거 계속 이렇게 다시 물어보고 확인하려면 귀찮지 않아?
그냥 한 번에 답 나오게 하는 법 알려줄까?”
그러자 엄마가 아무렇지 않게,
하지만 아주 환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뭐가 귀찮아. 재밌기만 한데. 이렇게 물어보고 저렇게 대답 듣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가 나와. 내가 한번 더 생각하게 되기도 하고.
혼자서는 절대 몰랐을 것들이야.”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본 것은 단순한 AI 활용법이 아니라
엄마가 평생을 살아온 방식 그 자체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우리 엄마는 늘 그랬다.
가족들의 아침상을 차릴 때,
콩나물 끝에 남은 잔뿌리까지 떼어내던 손과
낡은 옷가지를 티 나지 않게 수선하던 촘촘한 바느질.
귀찮을 수 있는 일 앞에서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자기 마음이 닿는 쪽을 선택했다.
엄마는 자기 입으로 고집이라 일컬었던
그 성실함이
이제는
차가운 화면 앞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동안 효율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질문을 이어가는 즐거움을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정답을 빠르게 얻어내는 것만 ‘잘하는 것’이라 믿으며,
대화가 주는 의외성과 확장의 기쁨을 ‘귀찮은 것’으로
치부해버린 건 아니었을까.
그날 이후,
나에게 ‘AI를 잘 쓴다’는 말의 정의는 완전히 바뀌었다.
정답을 빠르게 뽑아내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삶의 문제 앞에서
귀찮음을 감수하고
한 번 더 말을 거는 사람.
AI를 결과를 얻기 위한 도구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넓혀주는 상대로 두고
대화를 이어가는 사람.
세상은 여전히
화려한 기술을 가진 사람을 전문가라 부르지만,
나는 이제 안다.
귀찮아도 한 번 더 묻고,
조금 돌아가더라도
자기 삶을 성실하게 들여다보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진짜로 AI를 잘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성실함은
어떤 인공지능도
흉내 낼 수 없는
가장 강력한 알고리즘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