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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 시어머님이 들어왔다.
시어머니의 뜨개질
by
랑호
Jan 2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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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이 오신 지 3개월이 되었다
.
나도 어머님도 어느 정도 적응했다
.
한 달은 매일 색칠공부를 하면서 여가를 보내셨다. 그 덕에 나도 별일 없으면 같이 집에 머물렀다.
점심도 걱정되고 혼자 계시면 무료할 것 같아 그렇게 했다.
추석이 지나고부터는 주간 보호센터에 다니신다.
며칠 가고 가지 않을 줄 알았는 데 재밌어
하시면서 아침 일찍 준비하고 차를 타고 가신다.
센터에 갔다 오시면 뜨개질을 하신다.
처음엔 막내 손녀 조끼를 뜨고 계셨다.
가지고 계시던 실들을 활용해 예쁘게 만들어 주셨다.
재미가 붙였는지 실을 더 구입해서 큰 딸과 남편 조끼를 뜨겠다고 근처 뜨개방이 없냐고 물으셨다.
집 근처에 뜨개방이 있어 같이 실을 구입하려 갔다.
한참을 실을 보시더니 이 실은 너무 두껍고 이 실을 너무 얇고 하시며 고르셨다.
하늘색실과 검정노란색이 섞어 있는 실을 오만 이천 원에 구입했다.
그 가격이면 조끼를 사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을 구입 후 집으로 돌아온 후부터 새벽에도 방에 불이 켜져있어 보면 뜨개질을 하고 계시고 틈만 나면 뜨개질만 하시더니 10일 만에 큰 딸 조끼를 완성했다.
어머님은 언제까지 완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꼭 그날까지 끝내야 한다고 하셨다.
"어머님 공장에 물건 만드는 것도 아닌데 쉬엄쉬엄 하세요"
"
응
쉬엄시엄한다, 뜨개질을 하고 있으면 잡생각이 안 들고 좋다."
"무슨 걱정이 있길래 그러세요"
"내 몸도 걱정이고, 아들도 걱정, 손주들 학교 가는 거 돈도 한 푼 줘야 하고"
그 연세에 자기 몸 건사하기도 힘든데 자식 손주 걱정이 앞서신다.
평생을 손으로 그물 짜는 일을 하셔서인지 치매 5등급이신데도 뜨개질이 기억이 나시는지 잘 뜨신다.
조끼를 받은 딸은 할머니께
고맙습니다
인사하고는 돌아서서 나에게
"엄마 소매 길이가 안 맞아서
어떻게 입어?"
"그래도 할머니가 정성 들여 해
주셨는데 집에서라도 입어
,
할머니가 이젠 예전 같지 않으셔서 그래"
큰 딸 조끼를 다 뜨고 바로 남편 조끼를 뜨기 시작했다.
노란색실로 코로 잡았다가 너무 작다고 다시 풀기를 반복하시더니 며칠 만에 완성했다.
남편 조끼를 뜨면서 손자 조끼를 안 떠주었다고 말씀하셨다.
아들은 할머니에게 조끼가 필요 없고 안 입는다고 말을 했다.
"어머님 남편 조끼 뜨고 나서 제 것 떠주세요"
"아니 00이 조끼 안 떠줘서 내가 섭섭해서 안된다."
"00이는 조끼 안 입으니 뜨지 마시고 제 것 떠주세요?"
몇 번을 내 조끼를 떠달라고 말씀을 드렸는 데 손주 조끼를 떠야 한다고 실을 더 구입해 오라고 하셨다.
나는 살짝 서운해서 손주 조끼 뜨고 제 거도 떠주세요 했더니 대답이 없다.
맨날 고생을 니가 제일 많이 한다고 하시고는 필요 없다고 하는 데도 해주시고 며느리 생각은 없으신 거 같다.
드디어 아들조끼가 완성되었다.
아들은 살짝 걸쳐만 보고 살며시 내려놓았다.
아이들을 볼 때마다 어머님은
"추울 땔 조끼 입으면 따뜻한데. 왜 안입노?" 하신다.
애들은 안 추워요하고 슬쩍 넘어간다.
식구대로 조끼를 다 뜨시고는
"이제 그만 할란다."
"어머님 제 조끼 안 떴어요. 제 것 떠야지요?"
대답이 없으시다.
다시 "제 거 떠주세요" 하니
"이제 실이 없다. 실도 사야 하고 안 할 란다."
살짝 서운해서 어머님의 실바구니를 뒤져서 이실 저실 찾았다.
"어머님 이실 저실 섞어서 알록달록 짜주세요"
"알록달록하면 보기 싫다."
진짜 조끼를 뜨실 생각이 없으신 거 같다.
"괜찮아요 걸쳐서 입을 수 있는 조끼로 떠주세요"
계속 부탁을 하니 어쩔 수 없이 어머님은 알겠다고 대답하셨다.
"검정실로 하니까 눈이 침침해서 구멍이 안 보인다. 며느리가 시엄마 일 시킨다."
뜨개질을 하시면서 계속 중얼중얼하신다.
어머님 심심하신데 뜨개질하시면 좋지요하고 웃어넘겼다.
며느리는 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도리를 다 해야겠다.
조끼하나에 섭섭한 마음이 들 줄은 몰랐다.
아직 내 마음 수양이 덜 되었다고 느꼈다
.
감정은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어머님과의 관계를 더 좋게 하는 방법인
것 같다.
조끼가 완성되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입었다.
목 부분에 좁쌀만 하게 오돌토돌 올라와서 내가 실에 알레르기가 있는지 조끼를 하루 입고 나서야 알았다.
비록 어머님이 짜준 조끼는 입지 못하기만 결혼 25년 만에 처음 만들어 주신 거라 깨끗이 빨아 고이고이 간직해야겠다.
남편도 어머님께 25년 만에 받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조끼가 좋은지 집에서 늘 입는다.
어머님의 솜씨들
남편조끼
아들조끼
큰딸조끼
막내조끼
내조끼앞면
내조끼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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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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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이 뭔지 몰라 방황하는 50대입니다. 말로 다하지 못해 글을 씁니다. 스쳐지나가는 삶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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