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날아가는 시간 속에서, 두려움을 직시하고 사랑하는 것을 찾아 오늘을 살아내는 것"
브로드웨이의 전설적인 뮤지컬 <렌트>의 작곡가 조나단 라슨이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 <틱틱붐>을 역시 뮤지컬 <해밀턴>으로 유명한 브로드웨이의 잘 나가는 제작자 린-마누엘 미란다가 필름으로 옮겨놓은 뮤지컬 영화이다. 감독이 린 마누엘 미란다가 <렌트>의 엄청난 팬이고, 뮤지컬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만큼, 뮤지컬을 있는 그대로 필름에 구현하였다.
주인공 조나단은 뮤지컬 제작자이다. 8년째 디스토피아를 다룬 락 뮤지컬 <슈퍼비아>를 제작하고 있다. 어느새 그의 나이는 스물 아홉. 8일 뒤 생일이 되면, 그는 서른이 된다. 서른이라는 숫자는 94년의 김광석에게 뿐 아니라 90년의 조나단 라슨에게도 큰 의미를 가졌던 것 같다. 조나단은 8일이 지나면 자신의 청춘은 완전히 사라진다며 그때까지 세상에 아무것도 내놓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두려움을 느낀다. (30/90)
그런 그에게 한줄기 빛이 있다면, 자신의 생일 하루 전에 있는 자신의 뮤지컬 워크샵. 8년 동안 계속해서 다시 써온 뮤지컬을 세상에, 특히 제작자들에게 선보이는 날이다. 자신의 동료 제작자 중 한 명이 워크샵에서 그의 뮤지컬에 관심을 가진 제작자에게 만 달러 짜리 대형 계약을 따내고 신수가 폈다는 이야기를 들은 조나단. 그의 청춘이 패배자에서 뒤집힐 유일한 찬스는 워크샵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 그의 뮤지컬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할 노래, 전설적인 뮤지컬 제작자 스티븐 손드하임이 반드시 넣어야 한다고 조언한 그 노래를 만들지 못했다. 그에게 남겨진 시간은 일주일. 압박감에 시달리는 그는 환청을 듣는다. 틱.. 틱.. 하며 넘어가는 시곗바늘소리. 마치 시한폭탄처럼, 어느순간 붐하고 터져버릴 것만 같은 압박감을 견뎌내는 일주일이 필름에 담겨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한데, 그의 삶의 문제들은 그가 자신의 역작을 완성하는 것을 가만두지 않는다. 해낸 것 없이 아침 일찍 "문댄스 식당"에서 웨이터 일을 하는 그는 전기세가 밀렸다는 독촉장을 받으며 빠듯한 삶을 살고 있는 한편(Boho days), 그와 함께 배우의 꿈을 꾸던 룸메이트 마이클은 꿈을 포기하고 번듯한 광고회사에 취직하여 BMW를 끌고, 주차 요원이 있는 고급 아파트로 이사했다.(No more)
여자친구 수잔은 뉴욕에서의 경쟁에 지쳐 버크셔스로 함께 떠나기를 원하고 조나단은 이 가운데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다.(Johnny Can't Decide) 심지어 프레디를 비롯한 자신의 친구들은 에이즈로 죽어간다. 압박감에 결정은 피하고 점점 날카로워지는 조나단. 그의 청춘의 마지막은 어떻게 장식될까?
너 자신한테 이걸 물어봐.
널 움직이는 게 두려움이야, 사랑이야?
You need to ask yourself in this moment.
Are you letting yourself be led by fear or by love?
영화를 관통하는 질문. 영화의 첫번째 넘버 <30/90> 중간에 나오는 대화 장면에서 주인공 조나단 라슨의 친구인 마이클이 조나단에게 물어보는 대사이다.
주인공 조나단은 그의 청춘이 끝날 것만 같은 생각에 30살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워크샵에서 망신을 당할 두려움, 여자친구와의 관계가 망가질 것에 대한 두려움, 그저그런 삶을 살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 두려움 속에 뒤덮인 조나단은 문제를 마주하기를 거부하고 도망치거나 날카로워진 채로 주변인에게 상처를 준다. 두려움이 조나단을 움직일 때,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된다.
두려움에 가득찬 채로 아무 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로 부르는 넘버, <Johnny Can't Decide>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버크셔스로 떠나자고 말하는 수잔의 속마음을 지레짐작하고, 마이클의 성공은 끝이 없을거라 말하며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조나단. 영화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걱정을 노래하는 조나단의 가사 가운데 하나도 사실이 아님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으레 그러는 것처럼, 조나단도 두려움에 자신의 상상을 더하여 거대한 괴물로 만들어버리고, 쉐도우 복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조나단이 모든 것을 망쳐버렸을 때, 조나단은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한채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인 수영을 하러 떠난다. 여러 생각과 두려움이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 가득하지만, 그가 생각이 아니라 그의 동작에 몰입할 때, 그러다가 그가 그동안 두려워하던 숫자 30을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Swimming) 공포의 대상은 음표로 변하여 그의 마음속에 숨어있던 명곡, <Come to your senses>를 꺼내온다.
그가 두려움을 마주하는 장면이 수영을 하는 장면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원작자 조나단 라슨이, 그리고 감독인 린 마누엘 미란다가 의도한 바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의 주제인 두려움과 수영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수영을 배울 때 가장 먼저하는 것은 물과 익숙해지는 것과 더불어 물에 뜨기 위해 온 몸에 힘을 빼는 것이다. 우리의 본능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몸에 힘이 들어가게 되고, 이는 우리가 물에 뜨는 것을 방해한다. 물에 뜨기 위해서는 두려움에 잠식된 우리의 본능을 거슬러, 두려움의 대상인 물에 온몸을 의지해야만 한다. 우리의 상상이 만들어낸 괴물이 실제로 어떤 존재인지 마주해야만 한다. 조나단이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30"을 똑바로 마주했을 때, 그토록 바라던 클라이맥스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처럼.
내겐 시간이 없어!!
I'm running out of time!!
주인공인 조나단이 두려움을 계속해서 느끼는 이유는, 그가 그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의 우상이자 멘토인 브로드웨이의 거장 스티븐 손드하임은 27살에 데뷔하여 전설이 되었고, 비틀스는 28살에 모든 성취를 이루고 해체했다. 그런 천재들까지 가지 않더라도, 그의 부모님은 이미 30살에 2명의 자식과 번듯한 직장, 집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 비교했을 때 그는 세상에 내놓은 것 없는 채로 자신의 20대를 마무리해야 하는 상황. 그에겐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결국에 명곡을 완성하고 뮤지컬 워크샵을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제작자들로부터 극찬을 받은 그에게 돌아온 대답은 모두가 그의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는 것. 그의 작품은 브로드웨이에 올리기에 너무 예술적이고, 오프브로드웨이에 올리기엔 너무 예산이 많이 들어서 극찬을 받았음에도 팔리지 않았다. 그럼 자신은 이제 뭘 해야하냐는 조나단의 질문에 그의 에이전트 로자는 이렇게 답변한다.
다음 작품을 써. 그게 끝나면 또 쓰고. 계속해서 쓰는 거지. 그게 작가야. 그렇게 계속 써 재끼면서 언젠가 하나 터지길 바라는 거라고.
You start writing the next one. And after you finish that one, you start the next. And on and on, and that's what it is to be a writer, honey. You just keep throwing them against the wall and hoping against hope that eventually something sticks.
8년을 걸었음에도 아무도 자신의 뮤지컬을 사가지않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완전히 무너진 조나단. 마이클의 사무실에 찾아가 한바탕 하소연한 그는 자신을 달래는 마이클에게 자신에겐 시간이 없다고 화를 내는데, 마이클이 그에게 자신이 HIV양성이라고 밝힌다. 정말로 시간이 없던 것은 마이클이었던 것. 조나단은 혼란에 빠진다.
혼란에 빠진 그를 구해낸 것 역시 시간이다. 한참을 달리던 그는 센트럴 파크의 야외극장의 피아노를 치며 마이클과의 과거를 회상한다.(Why) 과거의 시간을 떠올리며, 자신이 이 일을 왜 시작했는지, 자신이 진정 사랑하던 그 순간을 떠올린다. 그 순간, 이렇게 멋진 하루라니 하고 감탄하던 그 순간을 다시 떠올렸을 때, 그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를 결정한다. (이 부분에서의 앤드류 가필드의 연기는 정말... 미쳤다.)
나는 생각해, 이렇게 가는 하루라니.
이렇게 가는 하루라니.
맹세할게.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내 남은 시간을 이렇게 살 거야.
I think, hey, What a way to spend a day.
Hey, What a way to spend a day.
I make a vow right here and now.
I'm gonna spend my time this way.
이게 진짜 인생인가?
Is this real life?
영화 안에서 제일 많이 반복되고 강조되는 단어는 삶(Life). 조나단이 자신의 가난한 삶을 자조하며 노래할 때의 가사, 마이클의 고급 아파트를 보고 놀라며 부러움을 느낄 때의 대사, 그리고 영화의 절정에서 마이클의 에이즈 감염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혼란스러워하는 조나단의 뒤에 흘러나오는 마이클의 울부짖는 넘버 <Real life>의 반복되는 가사. 모두 "이게 진짜 삶인가" 묻고 있다.
마이클의 소개로 마이클의 광고회사 포커스 그룹에 참여했을 때, 그의 창의성을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자 그는 이것이 자신의 남은 삶의 모습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안전하지 않은 물질을 팔아넘길 이름을 정해야 할 때 그는 이것이 자신의 남은 삶의 모습일까 두려워한다. 마이클과 다툴 때는 서로의 삶이 어떠한지를 논하며 다투고, "Why"에서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결정한다.
영화 중간중간, 앤드류는 삶에 대한 질문이 생길 때마다 이를 수첩에 메모해둔다. <슈퍼비아>가 제작자들에게 외면당하고 다시 시작할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많은 질문 뿐. 그가 남긴 삶에 대한 수많은 질문들은 마지막 넘버, "Louder than word"로 나타난다.
(클립에는 가장 중요한 마지막 부분이 조금 잘려있다. 영화로 보시는 걸 추천. 영화의 결말에 해당하는 부분이라 잘린 듯 하다.)
새장과 날개,
어느 쪽을 택하겠어?
새들에게 물어봐.
두려움일까, 사랑일까.
대답하지 마.
행동이 말보다 더 큰 울림을 주니까.
Cage or Wings.
Which do you prefer?
Ask the birds.
Fear or love, baby.
Don't say the answer.
Action speak louder than words.
요새 가장 많이 빠져있는 영화. 90년도의 뉴욕 소호를 다루는 영화지만, 2023년의 대한민국에도 여전히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시대에 남을 천재였던 조나단 라슨조차도 수많은 방황의 시간을 거쳤음을 보며 위안을 삼는다.
나 또한 영화 속의 조나단처럼 두려움과 불안에 쉽게 빠지는 사람이라 정말 제대로 몰입할 수 있었다. 결국 미래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을 찾아 오늘을 살아내는 것. 조나단이 <렌트>에서 강조하던 "No Day But Today"가 이미 이 작품에 묻어나있다.
실제 삶에서, <슈퍼비아>의 실패 이후 <틱틱붐>을 워크샵에서 선보인 그는 브로드웨이의 역사에 남을 명작 <렌트>를 완성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작품의 초연 전날밤에 대동맥류 파열로 서른 다섯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가 사망하고 완성되지 않았던 <틱틱붐>을 그의 동료들이 재구성한 것이 뮤지컬로 공연되었고, 이를 영화화한 것이 본작이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으로 알려진 앤드류 가필드의 노래와 연기가 발군이다. 특히 <Boho days>와 <Why>는 후시녹음 없이 촬영된 그대로 음원에 담겼는데, <Boho days>에서는 파티를 즐기는 예술가의 혼이 가득한 인간의 목소리로, <Why>에서는 혼란에 빠진 채 고뇌하며 눈물을 흘리는 인간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이 노래에 그대로 담겨있다. 이 작품에 그의 첫 뮤지컬 작품이라는 것이 놀라울 따름.
또한, 감독이 잘 나가는 뮤지컬 제작자 출신이다보니, 전반적으로 뮤지컬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다. 뮤지컬과 조나단의 삶을 오가는 구성은 뮤지컬을 감상하는 동시에 조나단의 삶에 몰입할 수 있게 하며, 조나단이 이 노래를 쓰기 위해 어떤 삶의 여정을 겪었을지 상상해보게 한다. 그 구성이 가장 잘 드러난 넘버는, 조나단이 여자친구 수잔과 다툴 때의 넘버 <Therapy>.
뮤지컬과 브로드웨이, 특히 <렌트>의 팬이라면 더더욱 이 영화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감독이 <렌트>의 팬인만큼 곳곳에 아는 사람만 알아볼만한 이스터에그와 카메오를 뿌려놨다. 나는 영화를 먼저 접하고 흥미를 느껴 뮤지컬을 알아보기 시작했기에, 좀 아쉬움을 느낀다. 만약 내가 <렌트>를 먼저 접했다면, 좀더 영화 속의 이스터에그들을 보며 세세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현재 내 삶에 정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영화이다. 개인적으로 <싱 스트리트> 이후 이렇게나 내 취향인 영화는 처음이다. 또 이런 영화를 찾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