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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ffe Feb 24. 2024

시대에 짓밟힌 이들에게 이야기를 부여하다

바빌론(Babylon), (2022)


시대에 희생되어 우스꽝스럽게 사라져간 이들에게 이야기를 부여하며 위로하다.

당신들의 이야기가
여기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고.


<위플래쉬>와 <라라랜드>의 연이은 성공으로 할리우드의 떠오르는 신예로 주목받던 데이미언 셔젤은 2022년말, 8000만 달러가 넘는 제작비를 들인 문제작 <바빌론>을 세상에 선보였다. 3시간이 넘는 긴 러닝타임과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표현방식에 호불호가 갈리며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영화 매니아들에게는 셔젤 특유의 인상적인 엔딩 장면으로 눈도장을 찍은 작품이다.


<바빌론>은 1920년대, 할리우드가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영화계에 뛰어들어 희로애락을 경험하는 다양한 인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특히, 아름다운 것 이면의 어두움에 관심을 보이는 셔젤의 영화답게, 할리우드의 아름다움과 어둡고 더러운 면을 동시에 조명하고 있다.


빗속에서 노래를 부르네.
그저 비를 맞으면서 노래를 해.

I'm Singin' in the rain.
Just Singin' in the rain.


영화 <바빌론>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1952년작 고전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 Singin' in the rain>을 먼저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시기를 다루고 있는 뮤지컬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는 아름다운 음악과 뛰어난 색감의 영상, 그리고 유쾌한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불후의 명작이다.


<사랑은 비를 타고>는 무성영화 시대의 스타 돈 락우드와 유성영화 시대를 상징하는 신예 캐시 셀든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돈은 처음에는 유성 영화에 적응하지 못해 관객들에게 비웃음을 사기도 하지만, 자신의 특기인 춤과 노래를 살려서 캐시와 함께 아름다운 영화를 만드는데 성공하고, 캐시를 대중에게 소개하면서 사랑에도 결실을 맺는다.


유쾌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화를 보면 눈과 귀가 즐겁지만, 한편으론 조금 불편하기도 하다. 영화에 돈과 캐시의 사랑을 방해하는 밉상 캐릭터인 리나가 등장하는데, 리나는 목소리가 특이해서 유성 영화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하면 특별히 잘못한 게 없기 때문이다. 영화 안에서 무성 영화 시대의 한물간 스타를 상징하는 리나가 웃음거리가 되면서 쫓겨나는 것을 보면 이 영화를 그저 즐겁게만 바라볼 수 없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 데이미언 셔젤은 집중한다. 유달리 "희생"이라는 테마에 집중하는 셔젤은 시대의 희생양이 된 리나 라몬트가 눈에 밟혔던 것 같다. <사랑은 비를 타고>와 완전히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서 유성 영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한물간 스타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그려낸 <바빌론>은, 어쩌면 <사랑은 비를 타고>에 대한 셔젤의 비판적 비평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영화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모두가 영화를 이루는 사람들이다. 배우와 제작자, 평론가와 엔지니어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영화를 만드는 것이 영화 내내 등장한다. 그런데 이들의 모습은 항상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영화에는 주먹구구식이었던 당시의 촬영장의 행태나, 소모품으로 취급되던 엑스트라의 모습이 여과없이 드러난다. 촬영장에서는 누군가가 계속 가혹한 환경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고, 인격적인 모독을 당하기도 한다. 석면을 들이붓는 인부의 모습, 봉급을 받지 못해 봉기를 일으키는 엑스트라를 총으로 제압하는 제작사, 술과 마약에 취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배우, 욕설을 멈추지 않는 괴팍한 감독까지, 어쩌면 블랙 코미디에 가까울 정도로 영화는 할리우드의 민낯을 보여준다.


그렇게 계속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유지되던 할리우드는 기어코, 영화의 주연들도 삼켜버린다. 유성 영화의 시대가 도래하자, 무성 영화 시대의 스타였던 넬리와 잭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 인기를 잃어간다. 트럼펫 연주자 시드니는 영화의 흥행을 위해 치욕적인 검은 화장을 강요받고, 자막을 만들 필요가 없어진 페이주는 버림받는다. 사랑하는 넬리를 지키기 위해 무정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던 매니도 결국에는 할리우드로부터 추방당해 도망치듯 L.A.를 떠난다.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리나에 그러했던 것처럼, 할리우드는 어떤 이들을 짓밟으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셔젤의 영화는 항상 아름다운 것을 위해 희생되는 것에 관심이 있다. <위플래쉬>에서는 뛰어난 음악적 성취를 위해 한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성이 희생되고, <라라랜드>에서는 달콤한 꿈을 위해 아름다운 사랑이 희생된다. <퍼스트맨>은 달에 가기 위해 희생된 우주비행사들, 사회적 문제들, 닐 암스트롱의 가족들이 비중있게 다뤄진다. 그의 영화는 항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름다운 것은 가치있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바빌론>에서도 셔젤은 희생된 자들에 초점을 맞춘다. <사랑은 비를 타고>의 리나를 떠올리게 하는 잭과 넬리는 시대가 변했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잃어간다. 진지한 장면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관객을 보며 슬픈 표정을 짓는 잭의 장면, 새로운 영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넬리의 장면은 <사랑은 비를 타고>의 비슷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비슷한 장면을 보며 느끼게 되는 우리의 인상은 사뭇 다르다. <사랑은 비를 타고>의 장면들은 우스꽝스럽지만, <바빌론>의 장면들은 때론 슬프고 때론 두렵다. 영화가 그들에게 이야기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밉상이고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여전히 보일법한 잭과 넬리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그들의 표정을 우리에게 보여주기에, 우리는 더이상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우스꽝스럽게만 바라볼 수는 없다.



영화 막바지에 가서야 매니는 넬리에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한다. 그런데 이때 매니는 다른 말 없이 "사랑해 Te amo"라는 말만 반복한다. 잭의 영화에서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린 그 장면처럼. 그 이전에, 이 영화가 오마주한 <사랑은 비를 타고>의 우스꽝스러운 장면처럼. 그런데 같은 대사인데도, 매니와 넬리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우리는 그 대사가 전혀 우스꽝스럽지 않다. 이 영화가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이런 일이다.


영화의 엔딩으로 가면, 영화계에서 도망치듯 떠난 매니의 후일담이 나온다. 수십년이 지나 홀로 우연히 할리우드로 돌아와 극장을 찾은 매니는 잠이 들었다가 무성 영화의 시대는 끝났고, 유성 영화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영화의 대사를 듣고 깬다. 그가 보러 갔던 영화가 다름 아닌 <사랑은 비를 타고>였던 것이다.


하필이면 보게 된 영화가 유성 영화의 과도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을 밉상으로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는 영화이다 보니, 매니는 자연스레 넬리와 잭을 떠올리며 웃음을 터뜨리는 관객들 사이에서 홀로 슬피 눈물을 흘린다. 단순히 이야기를 전해듣는 관객이 아니라 그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던 매니는 다른 관객들처럼 웃음을 터뜨릴 수 없다.


여기서 매니는 영화계에 발을 들이고 싶어 안달나있던 자신의 과거, 그리고 자신이 영화계에 들어오고 싶어했던 이유를 다시 떠올린다. 영화 초반에 스쳐지나갔던 그 대사가 다시 영화에 흘러나온다.


더 대단한 걸 하고 싶어서,
중요한 일 하고 싶어. 영원하고 의미 있는 일

I just wanna be part of something bigger. To be part of something important, something that lasts, that means something.


그러면서 영화는 <열차의 도착>에서부터 <아바타>까지 영화사에 남을 영화의 장면들을 몽타주로 담아내고, 필름 현상 장면, 주연들의 아름다운 영화 장면을 차례로 담아내며, 눈물을 흘리다 다시 웃음을 짓는 매니의 표정을 마지막으로 마무리된다.


https://youtu.be/fyh5H-7TzSU?si=4Pm-7F5AhPO5RxHx



아름답지만 조금은 난해할 수도 있는 영화의 엔딩은 어떤 의미일까 고민해보게 된다. 쉼없이 세 시간 넘게 달려온 영화의 끝에서 셔젤은 왜 수많은 영화의 장면들을 담아내야만 했을까.


셔젤의 의도와는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 이 장면을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영화 중반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배우 잭과 평론가 엘리노어의 대화 장면이었다.


고통스럽죠, 알아요. 누가 낙오되고 싶겠어.
하지만 백 년 후 당신도 나도 다 죽은 뒤,
언제라도 당신 영화를 다시 트는 순간,
당신은 다시 살아날 거야.
 
언젠가 영화 속 모든 배우들은 다 죽고
그 영화들도 기억에서 사라지겠죠.
모두 저 세상에서 함께 먹고
모험하고 전쟁하게 되겠지만
50년 후에 태어나는 아이는
화면에서 반짝이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
익숙한 친구처럼 느낄 거예요.
당신이 죽은 후에 태어난 아이인데도.
재능을 타고난 걸 감사히 여겨요.
당신의 시대는 끝났지만,
천사나 영혼들처럼 영원할테니.


시대는 그들을 외면했다. 이혼에 이혼을 거듭한 잭이 나에게는 다를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잭의 순진한 새 아내처럼, 잭도 시대가 자신과는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자신도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이 시대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과 동행할 수 없었던 잭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고, 넬리도 자신의 말대로 어둠 속으로 춤을 추며 사라졌다.


그런 이들에게 셔젤은 엘리노어의 입을 빌어 위로하고 있는 듯하다. 당신들의 시대는 막을 내렸을지 모르겠지만, 필름의 담긴 당신의 모습이 다시 스크린에 나타날 때마다 당신은 다시 살아나 우리와 소통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영원히 남는 것의 일부가 된 당신의 이야기는 백년 뒤에도, 어쩌면 그 백년 뒤에도 숨을 쉬며 불멸할 것이라고.



영원히 남는 것, 의미가 있는 것의 일부가 되고 싶다던 매니.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보며 슬피 울던 매니는 문득 자신의 말을 떠올리고는, 잭과 넬리의 이야기가 수십년이 지난 뒤에도 살아남아 화면 위에 살아있다는 생각에 다다랐을지도 모르겠다. 영화사의 수많은 장면들이 그러하듯이, 죽음 뒤에도 그 모습이 살아남아 전해지고 있다는 것에, 흘리던 눈물을 멈추고 그 꿈을 이룬 넬리와 잭을 보며 웃음을 짓게 된 것만 같다.



사실 할리우드만 그러하겠는가. 인류가 이루어낸 수많은 눈부신 성취 중에 다른 인류를 희생시키지 않고 만들어낸 성취가 어디있겠는가. 우리 인류는 항상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키거나, 착취하거나, 짓밟고 올라가는 방식으로 성장해왔다. 인간이 신의 자리에 올라선다는 "호모 데우스"의 세상이 나에게 전혀 희망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이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 메커니즘"으로 불리는 자신의 이론을 소개하며, 인류는 무리에 혼란이 가득할 때, 그 폭력성을 소수집단인 "희생양"에게 전가하여 해소하는 방식으로 평화를 유지해왔다고 말한다. 인류는 수많은 희생양의 유해 위에 공고히 서있는지도 모른다.



때문에 아무리 아름다운 성취를 보아도 희생된 누군가를 찾으려는 셔젤의 시선이, 이렇게 이루어진 성취는 과연 아름다운 것일까 몇 번이고 되묻는 그의 질문이 나에게는 유독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다른 한 편으론, 영화의 주인공들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부럽기도 하다. 그들은 원하던대로 영원히 남는 것, 의미를 가지는 것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모순된 마음을 어찌해야할지.


예술을 좋아하는 모든 이들이 꿈꾸는 결말이지 않을까? 영원히 살아 숨쉬는 것의 한 켠에라도 이름을 남기는 것.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어떤 소년과 시대를 넘나들어 소통하는 것. 그런 그에게 내가 받은 느낌이 전달되어 그의 삶이 변화하는 것. 단 한 사람일지라도.


나의 단어들이, 나의 이야기들이, 또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지기를. 서로 소통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나침반이 되기를. 나의 선배들이, 우상들이 나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나의 이 강렬한 느낌이 누군가의 영감이 되기를. 그리하여 내 손에 쥐어진 이 작은 바톤이 이어져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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