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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ffe Mar 03. 2024

언제 무너질 지 모르는 세상에서, 함께

덩케르크(Dunkirk), (2017)


언제 떨어질 지 모르는 포탄 아래에서, 무력하게 살아남은 것으로 서로가 서로를 구원해나가다.


<덩케르크>는 2차세계대전 초반 독일의 침공으로 완전히 포위된 영국군과 프랑스군 연합군의 철수작전을 다룬 영화이다. 당대 기준 시도된 적 없던 규모였던 약 34만명이 무사히 철수하고 영국 본토로 돌아가면서, 2차세계대전의 판도를 뒤집었던 작전으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세계사적으로 기억에 남을만한 이 사건을, 플롯의 마술사라고도 불리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잔교에서의 일주일, 배에서의 하루, 하늘에서의 한 시간을 교차편집한 특이한 구성으로 육-해-공이 합작하여 완성할 수 있었던 이 철수작전을 그려내고 있다.




덩케르크는 굉장히 특이한 전쟁 영화이다. 서로 다른 시간으로 흐르는 육해공을 오가며 시공간을 넘나드는 편집 기법 외에도, 일반적인 전쟁영화와는 매우 다른 문법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화끈한 전투 장면을 기대하고 이 영화를 관람한다면, 지루하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영화의 관심사는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의 전쟁 영화는 싸워 이기는 이야기이지만, 이 영화는 도망쳐서 살아남는 이야기이다. 얼굴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미지의 존재로 묘사되는 독일군으로부터, 언제 떨어질 지 모르는 포탄과 총성을 피해, 집으로 되돌아가려 애쓰는 군인들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를 전쟁영화보다는 재난영화에 가깝다는 평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 특별한 사람을 노린 것이 아닌, 우연히 떨어지는 포탄과 총알을 피해 생존하려 애쓰는 이야기. 어쩌면 이 치열한 시대 속에 생존하려 애쓰는 우리들의 이야기와 닮아있는지도 모른다. 한치 앞을 알 수 없이 언제 떨어질 지 모르는 부조리와 절망을 피하려 애쓰는 소시민인 우리의 모습은, 화면에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무명의 병사, 토미와 깁슨, 알렉스의 모습과 닮았다.



영화 속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 중에 하나가 "우연"이다. 주인공인 토미가 살아남는 원인에 우연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폭격기의 포탄이 토미 옆의 병사는 덥쳤지만 토미는 비켜간 이유도, 분대원들 중 토미 혼자 총알을 피해 달아날 수 있었던 이유도, 토미가 특별히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우연히 그 자리를 피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주인공이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가 우연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 세상의 많은 일들이 그러하듯이. 특히나 영화에서 주인공이 영웅이 아니라 소시민 중에 한 명 정도로만 그려지기 때문에, 더더욱 토미의 생존은 그의 뛰어난 어떤 능력 때문이 아니라 우연에 의한 것으로 보여진다.



의도 없이 재난처럼 떨어지는 포탄 앞에 소시민은 무기력하다. 자신이 살아남았음에도 스스로 결정한 것이 하나도 없기에 더더욱 무력하고 두렵기만 하다. 다음 번엔 저 포탄이 덮치는 것이 내가 되고야 마는 것은 아닐지, 물음을 멈추지 못하고 계속 몸부림치기만 한다.



생존은 불공평한 거야. 
누군가가 내려야만 나머지가 살아.

Survival's not fair.
Somebody's gotta get off, so the rest of us can live.


무기력한 소시민은 어떻게든 문제를 통제하고자 한다. 문제를 통제하려는 가장 대표적인 시도는 외부의 악을 만드는 것이다. 무리의 소수 집단을 악마화한 희생양으로 만들고 추방하여 무리 안의 폭력을 해소하면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혼돈 속에 빠진 인간의 생존방식이었다. 르네 지라르가 주장한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버려진 배 안으로 숨어든 병사들은 사격연습을 하던 독일군 병사에게 발각된다. 너무 많은 병사가 숨어든 데다가 사격연습으로 한 두 군데 구멍이 나기 시작하자 배는 통째로 물 속에 가라앉을 위기에 처하게 되고, 이때 알렉스와 다른 병사들은 살아남기 위한 행동을 시작한다. 


모두가 살기 위해선 누군가가 배에서 내려야만 하다고 외치면서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깁슨을 독일군 스파이로 몰아간다. 결국엔 불어로 입을 뗀 깁슨이 프랑스 병사였다는 것이 알려지자 이번엔 그가 영국인을 죽이고 영국 군사로 위장했을 것이라고 몰아간다. 토미가 침착하게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이야기하고, 프랑스 군도 우리의 아군이며, 한 명이 내려봤자 소용 없을 것인데다가, 그것은 불공평한 행위라고 말리지만, 그들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토미에게도 "너는 다른 부대 사람이잖아"라고 선을 그으며 깁슨 다음은 네 차례라고 외칠 뿐. 같은 나라, 같은 지역, 같은 부대 등등. 공통점을 찾아 연대하고 그 밖의 집단을 악마화하여 문제를 통제하고자 하는 군인들. 어쩌면 우리 시대의 우리들의 모습과 닮았는지도 모른다.




소시민인 이들을 구원하려는 이들이 있다. 철수 임무에 동원된 문스톤 호와 폭격기를 막는 임무를 지고 하늘을 나는 세 기의 스핏파이어 조종사. 살기 위한 몸부림을 멈출 수 없는 이들을 구해내기 위해 이들은 한 자리에 모인다.


어쩌면 영웅의 모습으로 그려내기 딱 좋은 인물들이다. 목숨을 걸고 다른 사람들을 살려내기 위해 전쟁터로 달려든 용감한 사람들. 이들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들었어도 깊은 감동을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그들은 영웅이 아니다. 그들도 불완전한 인간들일 뿐이다. 서로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한낱 인간들.


독일 공군의 폭격기가 철수 작전을 방해하려 문스톤 호를 덮치려 들 때, 바다 위에서 머리 위의 비행기를 올려볼 수 밖에 없는 배 위의 사람들은 너무나도 무력하다. 그들은 조종사들의 도움이 없이 살아남을 수 없다. 반대로 전투 중에 격추당해 물 위에 비상착수한 조종사 콜린스는 누군가가 건져내주기 전까지 무력하다. 배 위의 사람들이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면 그는 살아남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이 영화에서는 소수의 영웅이 모두를 살려내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힘을 합쳐 서로가 서로를 살려내야만 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본토의 모든 사람들이 힘을 합쳐 모든 병사들을 살려낸 것처럼. 어쩌면 그것만이 이 세상을 견뎌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뭐가 보입니까? /
조국!

What do you see? /
Home!

신경 쓰지 말아요 우린 아니까

They know where you were.


영화에서 진짜 영웅을 찾는다면, 톰 하디가 연기한 조종사 파리어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연료에 임무를 완료할 지 집으로 돌아갈 지 고민하다가, 모두를 살리기 위해 돌아올 연료를 남겨두지 않은 채 폭격기를 상대해내고, 해변에 불시착해 독일군에 사로잡힌 파리어. 파리어의 상함으로 영국 군대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또다른 영웅이 있다면 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애쓰던 제독, 볼튼 중령이 있다. 병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애쓰던 그는 모든 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가자, 남아있는 프랑스군을 철수시킬 차례라면서 덩케르크에 남는 것을 선택한다.


이들은 다른 이의 평안함을 위해 자신의 편안함을 포기한다. 집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음에도 다른 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기꺼이 그 기회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이들의 선택은 마땅히 인정해주어야 할 이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파리어의 동료인 콜린스는 조국에 도착하자 공군은 뭘하고 있었냐는 다른 병사의 비아냥을 들어야만 했다. 사실 이것은 같은 조종사인 파리어를 향한 비아냥이기도 하다. 소시민은 자신의 구원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탓하며 조롱하기에 바쁘다.


 수고했어. / 
살아 돌아왔을 뿐이에요. / 
그거면 충분해

Well done, lads. Well done. / All we did is survive. / That's enough.


가까스로 고국 땅을 밟은 토미와 알렉스. 알렉스는 그런 자신이 창피하기만 하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온 것도 아니고, 무력하게 포탄에 휩쓸려 발버둥치기만 하다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가 생존을 위해 희생양으로 삼으려했던 깁슨은 물 속에서 안타깝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그런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떳떳하게 고국 땅을 밟을 수 없다.


나 또한 그렇다. 삶의 부조리와, 불의함과 싸워 이긴 것도 아니고, 그저 파도에 휩쓸려 헤메이다 가까스로 집에 도달하기만 하는 듯한 삶. 지난 날의 결정들을 복기해보면 부끄럽기만 한 이 느낌. 이 무력감 속에 나는 절대 떳떳하지 못 하다.


그런 알렉스를 향해 격하게 환영해주는 시민들. 그것으로 족하다 외치는 맹인 할아버지. 그리고 이것이 위대한 승리라고 외치는 처칠의 명연설까지. 영화는 부조리 속에서 생존을 향해 부유하기에 급급한 우리에게 "살아남은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위기의 순간에는.
전멸의 순간에는.
생존이 곧 승리이다.

At the point of crisis.
At the point of annihilation.
Survival is victory.


놀란은 2차세계대전의 전황을 뒤바꾼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철수작전을 소재로, 우리의 삶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그러면서 생존을 위해 애쓰는 우리의 민낯이 어떤지 낱낱이 드러내고, 그런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구원하고, 다른 이의 평안을 위해 비록 인정받지 못할지라도 나의 편안을 내려놓는 것. 언제 무너질 지 모르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모두가 영웅처럼 살 수는 없다. 우리는 그저 부족한 인간들이기에. 우리의 발걸음은 영웅이나 성인처럼 고귀하지만은 않다. 어쩌면 우리 손에도 피가 묻어있을지도 모르고, 후회할만한 선택들이 끝없이 우리를 괴롭힐지도 모른다.


놀란은 그런 소시민인 우리에게, 그만하면 되었다고, 살아남았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위로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토미와 알렉스를 위로하는 눈 먼 할아버지의 입을 빌려서라도.


뱀발로, 영화에 관심이 뒤늦게 생겨서 아쉽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사운드 빵빵한 상영관에서 커다란 화면으로 보았다면 정말 압도적인 분위기에 전장 한 가운데로 떨어지는 경험이었을텐데... 조그만 내 방에서 노트북 화면에 이어폰만으로 이런 전율인데 영화관에서였다면 얼마나 소름이 돋았을지.


돌비나 아이맥스로 재개봉하기를... 기다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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