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깊이10

by 정동주

객석에는 당신 말고는 아무도 없다.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당신은 불안해진다. 과연 당신 한 사람을 위해서도 연극은 공연될 것인지? 그러나 그건 기우였다. 시간이 되자 배우는 객석에 있는 당신 한 명을 위해서 기꺼이 공연은 시작된다. 아니 당신이 없어도 정시에 출발하는 열차처럼 공연은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연극 여주인공에 집중한다. 당신의 몸에 달려 있던 수축한 근육들이 서서히 이완되기 시작한다. 당신은 아득해지고 또한 아뜩해진다. 지금 이 순간은 연기자가 아닌 관객이라는 점에서 모처럼 편안해진다. 그동안 부회장 앞에서 배우처럼 연기하면서 살아왔기에 더욱 그렇다.

이제 배우와 관객이 어울리는 시간이다. 연어 복장을 한 여주인공이 무대를 내려와 당신을 향해 걸어온다. 아니 당신을 향해 유영한다. 여배우는 당신 바로 앞 의자에 앉는다. 당신은 여배우를 바라본다. 당신 앞에 앉은 여자의 눈을 보면서 당신은 바다를 떠올리고, 알을 낳기 위해 강으로 역류하는 연어를 생각한다. 그리고 당신은 그녀에게 울면서 매달리고 싶어진다. 당신이 가야 할 목적지가 표시된 지도를 제발 달라고 소리치면서 말이다.

당신을 바라보던 여주인공이 당신의 손을 잡아끈다. 당신은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그녀를 따라 나간다. 무대 위에 올라선 당신을 위해 여배우는 모자를 보여준다. 연어 모양을 흉내 낸 모자가 당신 눈앞에서 당신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여배우가 모자를 쓰라는 제스처를 취한다. 당신은 여전히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여자는 당신이 모자 쓰기를 재촉한다.

당신은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연어 모자를 집어 든다. 모자를 착용하자 당신은 깊은 바다에 들어온 듯한 야릇함을 느낀다. 연어 복장을 한 여주인공이 당신을 향해 자기를 따라오라고 손짓한다. 당신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면서 머뭇거리다가 뒤를 따른다. 이제 당신을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당신의 유영은 이내 막히고 만다. 그 결정적인 순간에 전화벨이 울린 것이다.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발신자는 부회장일 거라고 당신은 확신한다. 아마 어디선가 술을 마시다가 당신을 호출했을 확률이 높다. 이제 당신은 바로 업무규정 10조 1항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운전기사는 부회장을 해치거나 부회장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이 그의 호출에 10초가 지나도록 답변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부회장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부회장이 내린 명령이 1항에 어긋나지 않는 한 복종해야 함에도 당신은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당신은 나쁜 일을 하는 것이다. 물론 당신은 10조 3항에 따라 당신 자신을 지킬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또한 10조 1항과 2항의 원칙을 위배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허용되기 때문에 당신은 스스로 위험한 일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6, 7, 8, 9, 10 …. 벨 소리가 울린 지 이미 10초가 넘어섰다. 그런데도 당신의 머릿속은 이 모든 것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여배우가 멈춰 선 당신을 바라본다. 다시 침묵이 이어진다. 그 침묵은 당신의 머릿속에서 언어가 되지 못한 것들과 엉킨다. 날이 선 투우사의 칼들과 케렌시아와 상실한 것들과 … 그러나 그 엉킨 것들은 그리 오래 머물지는 못한다. 침묵이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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