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를 나온 당신은 이제 집으로 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다. 사건 조사를 받느라 몸과 마음도 지친 상태가 돼버렸다. 절대 합의란 없습니다. 절대로, 법이 그렇다고 할지라도 끝까지 싸울 겁니다. 단호했던 남자 사장의 말이 떠오른다. 이건 쌍방이고, 고소해도 되지만 서로 원만하게 합의했으면 한다고 조언한 경찰의 얼굴도 생각난다. 그 말에 남자 사장의 입술에 번진 차가운 경멸과 분노도 떠오른다. 그렇게 여러 가지 일이 있었고, 여전히 피곤한 하루였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당신의 허기를 달래주던 국밥집이 당장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는 염려감도 든다. 그럼 당신의 벽이 되어준 곳이 또 하나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걸으면서 당신은 오늘따라 집에 들어가기가 싫다는 생각을 한다. 예전 같으면 자리에 누우면서 당신은 집만한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도로시처럼 말이다. 하지만 문득 끊었던 담배처럼 끊었던 골프가 생각난다. 잘나가던 때에 당신은 골프를 쳤고, 아내는 쇼핑이 취미가 되어 갔다. 두 사람을 만족하게 했던 것은 해외여행이었다. 돈은 원하는 만큼 벌 수 있었기 때문에 각자의 취미 생활을 간섭할 이유가 없었다. 아내는 모피 가죽 코트를 여러 벌 사들였다. 매달 날아오는 카드 값에 당신은 충격을 받았지만, 아내에게 내놓고 불만을 표시한 적은 없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제주도로 당일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나중에는 홍콩에서 근사한 한 끼를 먹기 위해 출국을 하기도 했다. 이 역시 기억이 희미한 때에 있었던 일이다.
어디로 갈까? 당신은 잠시 주저한다. 최근에 와서 목적지는 부회장이 지시하는 대로만 움직였기 때문에 스스로 목적지를 정하는 것이 왠지 낯설다. 예전에는 간판이 현란했던 곳이지만, 지금은 문 닫은 가게가 많아져서 그에 비해 소박한 느낌이다. 사실 당신에게 내일은 미지의 시간이다. 모든 것은 부회장의 결정에 달렸으며, 그가 순간순간마다 어떤 결정을 내릴지 예측은 불가하기 때문이다. 사소한 것 하나로 인해 출근 날이 퇴직일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당신의 의지 또한 알 수 없는 것이다.
철저하게 혼자가 되는 법을 익혀야 한다고 당신은 다짐하면서 무작정 걷는다. 그렇게 걷다가 당신은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가 만져지는 것을 느낀다. 발걸음을 멈춘 당신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다. 바로 연극표다. 세탁소를 하는 김 비서가 준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냥 버리려 했는데 막상 버리려고 하니 왠지 아깝다는 생각도 든다. 마침 그 표에 소개된 소극장은 오 분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다. 문득 당신은 오늘 밤은 오랜만에 문화생활이라는 호사를 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당신은 마음을 정하고 소극장을 향해 걸어간다. 얼마 가지 않아 작은 빌딩들 사이로 목표로 했던 소극장이 눈에 띈다. 입구에는 코로나 환경으로 경영이 어려워 이번 주까지만 공연하고 더는 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공연 시간이 다 되었음을 확인한 당신은 서둘러 입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