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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재 Nov 11. 2024

인체와 타이포그래피

더 잘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

과거 미대입시를 준비하며 미술공부를 할 때, 중학교 미술교사로 근무하셨던 어머니와 미술학원 선생님이 자주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다양한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서는 인체를 잘 그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체는 골격과 근육으로부터 발생하는 수많은 미세한 특징들이 모인 조형의 집약체이다. 얼굴과 몸의 비례부터, 눈코입의 비례, 코의 높이에 따라 달라지는 그림자, 눈꺼풀 아래로 눈동자에 생기는 미세한 그림자 등 인체만이 가지는 조형적인 특징은 무궁무진하다. 나는 그림을 잘 그리고 싶었고, 인물화를 많이 그렸다. 미술해부학이라고 불리는 인체 공부는 관찰력과 비례, 묘사능력을 기르기에 최고의 방법이었다. 어느 정도 인물화가 잘 그려질 때쯤, 다른 그림들을 그리는 것 또한 어렵지 않게 느껴지고 자연스레 자신감이 생겼다.


과거에 그렸던 그림


디자이너인 지금은 타이포그래피, 글자가 ‘인체’라고 느껴진다. 나는 늘 타이포그래피의 감각을 기르기 위해 노력한다. 타이포그래피란 무엇일까? 사전적으로는 활자 서체의 배열, 특히 문자 또는 활판적 기호를 중심으로 한 2차원적 표현으로 정의한다.(위키백과) 타이포그래피는 읽기 위한 글자를 운용하는 것(편집 디자인), 보기 위한 글자를 그리는 것(레터링), 글꼴을 디자인하는 것(폰트 개발)과 같이 글이 되기도, 그림이 되기도, 재료가 되기도 하며 그래픽디자인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글자를 다루는 것은 인체를 그리는 것과 같이 아주 미세한 감각들을 필요로 한다.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읽기 위한 타이포그래피에서는 가독성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가독성을 위한 타이포그래피는 글을 읽으며 생길 수 있는 작은 불편함들을 제거하는 예민하고 심도 있는 작업이다. 이를테면 맥락에 맞는 서체를 고르는 것부터, 글자의 크기를 조정하고, 글자 사이, 글줄 사이의 간격을 조정하고, 한 글줄에 적당한 단어의 개수를 배치하는 것 등 가독성을 위한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해야 한다. 읽기 위한 타이포그래피는 독자의 시선이 피로하지 않게 움직이도록 설계하는 것과 같다.


활자, 낱말, 문단은 완벽하게 읽을 수 있는 요소로 자리 잡는 동시에 종이를 무대로 움직이는 배우가 된다. 활자로 디자인하는 것, 즉 타이포그래피는 어떤 면에서는 무대 연극과 같을지도 모른다.
- 아드리안 프루티거 -


보기 위한 타이포그래피, 레터링은 주로 시선을 주목시키기 위한 제목이나 로고 디자인을 위해 글자에 특별한 개성을 담아내는 작업이다. 글자에 특별한 개성을 부여하려면 먼저 글자를 이루는 필수적인 조형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한글의 히읗(ㅎ)은 하나의 원과 두 개의 선(또는 꼭지가 느껴지는 하나의 선)으로 구성된다. 히읗(ㅎ)을 아무리 새로운 형태로 레터링을 한다고 해도, 하나의 원과 꼭지가 있는 선이 느껴지도록 디자인해야 히읗(ㅎ)으로 인지될 것이다.


알파벳 대문자 A의 경우에는 글자를 이루는 필수적인 조형이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A는 보통 가운데 가로획이 없어도 A로 인지된다. 또한 A의 윗부분이 삼각형이 아닌 사각형의 모양이거나 둥글게 되어도 A로 보인다. 하지만 중간 가로획이 없이 둥글거나 사각형의 머리를 가진 A는 자칫 소문자 n으로 인지될 수 있도 있다. 소문자 n이 섞여있는 글자를 레터링 할 때는 이를 유의해야 한다.


모든 글자에는 글자를 이루는 고유한 얼굴이 있다. 레터링은 글자의 얼굴을 새롭게 해석하여 변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레터링은 형태를 이루는 작은 디테일을 파악하는 감각과 전체의 어울림을 보는 객관적인 시선을 키워준다. 그리고 다양하고 새로운 표현을 통해 그래픽디자인 역량을 기르기에 좋은 타이포그래피이다.


한글 레터링 개인작업, 서정적인 인상을 줄 수 있는 표현을 공부했다.


폰트를 개발하는 일은 개인적으로 타이포그래피 분야에서도 가장 전문적인 영역이라고 생각된다. 폰트 디자인은 나노단위의 조형미를 계산하는 작업이다. 폰트는 아주 크게 보일 때와 본문으로 사용되어 작게 보일 때 느껴지는 인상을 모두 고려해서 개발된다. 가령 한글 폰트에서 이응(ㅇ)의 디자인이 타원인지, 정원에 가까운지에 따라 글줄을 이루었을 때 느껴지는 질감은 매우 달라지게 된다.


나는 특히 본문용 폰트를 디자인하는 이들을 존경한다. 보통 본문용 폰트는 공기에 비유하는데, 우리가 숨을 쉴 때 공기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글을 읽을 때 글자의 생김새는 인지하지 않는다. 내용보다 글자의 디자인이 먼저 보인다면 글을 읽기 불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본문용 폰트는 “디자인하지 않은 것처럼 디자인하는 것”이 핵심이다. 앞선 레터링이 가시성이 중요하다면 본문용 폰트는 가독성이 중요하다.


화려한 장식을 더하는 것보다 필수요소를 남기며 덜어내는 것이 더 어려운 법이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가독성이라는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본문용 폰트 개발은 우리 눈을 위한 인체공학적 작업이기도 하다. 글자에서 미세한 디자인의 차이가 가독성의 효과와 폰트의 큰 인상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본문용 폰트를 디자인하는 이들은 작은 조형미를 다루는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본문용 글자를 크게 확대해서도 보고, 문장을 만들어 작게 글줄로도 보며 비교해 보면 그들의 섬세한 형태적 감각을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다.


좋은 본문 타이포그래피와 기능적인 본문용 폰트는 시간을 두고 읽어 봐야 그 진가를 안다. 수백 쪽에 달하는 긴 본문에 쓰이는 글자는 마라톤을 할 때 신는 러닝화와 같아서, 인체의 피로를 덜어 주어야 디자인이 잘된 것이다.
- 유지원, 글자 풍경 -






타이포그래피를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레 섬세한 시선을 가지게 된다. 섬세한 시선은 더 나은 조형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더욱 감각 있는 디자이너로 발전시킨다. 타이포그래피 공부는 디자인을 더 잘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자, 인체를 그리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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