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에 대한 생각
[조금이라도 불편한 것 같다고 느끼면 바로 차단, 뮤트, 언팔 -> 확증 편향 심해지고 자기 확신에 빠져든다 -> 편안함, 안락함] - 저자가 말하는 ‘문학의 본질’이 파괴되는 과정 속에서, 인간(유저)은 플랫폼의 이윤 창출을 위한 도구로서의 역할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음. 본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금의 문제는 ‘충족되면서 소외되는 새로운 노동 문제(살아가는 것 자체가 생산에 동원)’인데, 현재 일본 사회는 감정화되고 있기에 이러한 문제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이 ‘비평’을 쓴다, 라고 말하는 책이었다.
읽으면서 테리 이글턴의 책에서 봤던 말이 떠올랐다. “위계를 무너뜨리려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 정신의 발현으로 이어지기보다는 ‘가치’라는 관념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 오쓰카 에이지도 문학이 보편화되는 게 좋은 기회이지만, 그것이 좋은 기회로 활용되기보다는 자신이 생각하는 문학의 ‘가치’를 무너뜨리고 있음을 경계하는 것 같았다. 이글턴은 다양성으로 불리는 것들이 계급 문제를 은폐한다고 말하고, 오쓰카 에이지는 감정화라는 것이 ‘충족되면서 소외되는 새로운 노동 문제(살아가는 것 자체가 생산에 동원되는 것)’를 외면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난 문학도 모르고 사회학도 모른다. 그리고 문학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다. 저자가 생각하는 문학의 본질이 진짜 문학의 본질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문학이라는 것에 본질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저자가 말하는 감정화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며 읽었다. 콘텐츠가 흘러넘치는 지금, 굳이 내가 불편할 것을 볼 이유가 사라진다. 진이 빠지는 하루 끝에는, 가볍게 머리를 비울 수 있는 콘텐츠를 원한다. 단번에 감정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을 원한다. 어떤 이가 구구절절 자기 생각을 말하면, 세 줄로 요약을 해주길 원한다. 나의 심기를 건드리는 주장을 하는 사람에게는 ‘한남’, ‘페미’, ‘이대남’, ‘이대녀’, ‘틀딱’ 등의 단어로 재갈을 물린다. 그렇게 재갈을 물리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일까. 쉽게 재갈을 물리고 편안함을 얻는 과정에서 저자가 말했던 ‘타자와의 접촉이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불편함’을 점점 수용하지 않게 되는 것 같다. 이러한 과정 끝에는 과연 무엇이 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