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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막얼음 Mar 22. 2021

덕질, 나도 해보고 싶다

덕질 대체 어떻게 빠지는 건데

지난 금요일 힘겹게 근무를 끝내고 젖은 낙엽처럼 지쳐버린 상태로 퇴근한 나는 친한 회사 동료 둘과 함께 교대로 갔다. 회사 주변에서 편하게 모이기만 했던 우리가 그 멀리까지 간다는 건 큰 결심이었다. 코로나로 인한 단축 영업으로 다들 어찌나 발 빠르게 예약을 하는지 회사 주변에 자리 남는 음식점이 없어 교대까지 가게 된 것이다. 가까운 곳에 예약이 안된다 하여 소중한 우리의 불금을 아무데서나 보내긴 싫어 분위기 있는 곳을 찾다 그나마 자리잡기에 성공한 장소 였다.(우리는 이런 핫한 장소 가는 걸 좋아한다.) 테이블 넷, 바 자리 다섯 정도 있는 메탈과 화이트 조합의 모던한 인테리어로 되어있는 자그마한 레스토랑이었다. 특히 오픈 키친이어서 셰프가 요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 더욱 내 취향이었다.

 

평소 운전해서 출퇴근하는 한 친구는 그 날 와인을 마시기 위해 일부러 차 없이 대중교통으로 출근까지 감행했다. 최근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는지 금요일에 술을 꼭 마시겠다는 그 열정은 평일에 억압되어있던 자유를 드디어 되찾은 듯한 느낌이 들어 더 간절하게 느껴졌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레스토랑에 입장해 예약된 좌석에 앉아 추운 몸을 녹이기도 전에 기름떡볶이와 트러플 소스가 곁들여진 바게트 빵, 화이트 와인을 먼저 시켰다. 타파스 형식의 메뉴로 이루어져 있어 생각날 때마다 요리를 하나씩 더 추가하기로 하고 와인부터 홀짝이기 시작했다.

 

회사 업무부터 시작해서 최근 화났던 일들까지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하다 한 명이 나에게 요즘 표정이 유독 안 좋다고 금방 기분이 나아질 줄 알았는데 꽤 오래가는 것 같다고 걱정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회사에서 자리도 나와 가깝다 보니 오다가다 내 얼굴을 실시간으로 살필 수 있는 최적의 친구였다. ‘맞아. 요즘 삶이 너무 재미가 없어. 매일 똑같고 의욕도 없어.’라고 저번 모임 때와 같은 소릴 했더니 다른 친구가 취미를 가져보라는 얘기를 하면서 나보고 인생에서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냐고 물었다.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행복? 그냥 뭐 해외여행 다닐 수 있을 때가 좋았지.’ (실제로 나의 유일한 스트레스로부터의 도피처이기도 했다.) 그랬더니 여행은 누구든지 좋아하지. 그런 두리뭉실한 것 말고 정말 성취감을 느꼈다거나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냐고 다시 묻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에 빠지니 레스토랑에서 제일 시끄러웠던 우리 테이블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둘 다 내 대답만을 기다리는 것 같은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그냥 친구에게 되물어봤다. 너희들은 행복했을 때가 언제였냐고. 한 명은 요즘 골프에 흥미를 붙였는데 최근 필드에 나가서 버디를 친 그 순간 성취감에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고 한다. 다른 한 명은 자기가 예전에 재수를 했는데 엄격하던 아빠에게 대학 입학 통보를 알려줬을 때 인정받았던 그때가 너무 행복해서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둘 다 기다렸다는 듯이 본인들의 행복했던 순간을 술술 말하는 것이다. 우와…. 그렇게 바로 생각이 난다고? 진심으로 감탄해 온 몸이 굳어버렸다. 그러게. 나는 왜 행복했던 순간이 떠오르지 않을까. 분명히 있을 텐데.

 

내 차례가 다시 돌아왔는데도 행복했던 순간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나를 기다리던 친구들은 침묵을 참지 못하겠는지 갑자기 나에게 덕질을 해본 적은 있냐고 물었다. 한 친구는 예전에 SS501의 허영생을 너무 좋아해서 팬카페 활동뿐 아니라 거의 사생팬처럼 따라다녔다고 한다. 부끄러운 과거이니 비밀로 해달라며 귀엽게 신신당부도 했지만 내 글을 읽게 될 일은 없을 것 같으니 편하게 적어본다. 다른 친구도 현재 이서준을 너무 좋아해서 이서준이 나오는 모든 프로그램을 샅샅이 찾아보고 그의 스케줄을 줄줄 꿰고 있었다.

 

둘 다 눈을 반짝거리며 각자 덕질했던 경험을 공유하는데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덕질을 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연예인이든 운동이든 요리든 남들 다하는 덕질을 못해보다니. 학창 시절 친구들이 클릭비, 지오디, 동방신기 등 자기 취향의 연예인 덕질을 할 때도 멀찌감치 서서 웃으며 호응해주는 게 다였고 여전히 그렇다. 혹은 좋아하는 척을 한 적은 있었다. 이렇게 뭐든 쉽게 흥미가 생기지 않는 내가 그나마 미술이 쉬웠고 집중할 수 있었기에 칭찬을 곧잘 받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진로를 그쪽으로 정한 것이 다행이다. 그거라도 없었으면 지금 내가 디자인 말고 무슨 일을 하고 있었을까.

 

학창 시절에 다양한 학원, 과외도 많이 다녔었다. 모든 걸 경험을 해보고 그중 하나라도 몰두할 수 있는 것을 찾길 바랬던 엄마의 바람이 있어서였을까. 남들 다 하는 서예, 속독, 피아노, 발레, 미술 학원은 물론이거니와 성악, 바이올린, 오카리나, 플루트, 스쿼시, 육상, 도자기 등 배운 것도 많다. 매 번 초반에는 집중해도 얼마 못 가 싫증이 나버렸고 엄마는 그때마다 뭔가 하나라도 끈기 있게 오래 못하는 나를 보며 ‘얘는 나중에 커서 뭐가 되려고 하나를 진득하게 못하지.’라고 생각하며 불안해하셨다고 했다. 친언니는 어렸을 적 성악으로 키운 발성을 바탕으로 현재 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어 보컬, 작사, 작곡에도 참여하며 공연도 하는 등 왕성한 취미활동을 하고 있다. 반면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취미를 찾기 위해 요리, 등산, 웨이크보드, 우드 카빙, 재즈댄스, 필라테스, 골프를 배우기도 하고 수영도 못하는데 태국 섬까지 가서 스쿠버다이빙 오픈워터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이런 걸 보면 또 호기심은 왕성해서 다양한 경험은 많은데 아직도 내놓을만한 취미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그렇다고 퇴근 후 아무것도 안하진 않는다. 꾸준히 하고 있는 필라테스는 기초 체력이 약하다고 생각해서 살기 위해 하는 느낌이고, 그 외에도 하면 하지만 뭐 안 해도 그만인 그런 느낌으로 자전거도 타고 산책도 하고 원데이 클래스도 얼마나 자주 다녔는지 모른다. 몬스테라와 테이블야자를 수경 재배해보기도 하고(아직 살아있기는 하다. 흥미가 떨어졌을 뿐.) 액세서리를 만들겠다고 동대문에서 자재를 떼와 직접 조합해 만들어 인스타 계정을 파서 홍보해보기도 하고 하여간 가만히 있지 않고 뭔가를 하기는 한다. 그럼에도 이건 이래서 꾸준히 하기엔 별로고 저건 저래서 별로라고 하는 걸 보면 나도 참 까다로운 모양이다. 


덕질을 해 봤거나 하고 있는 사람들은 나에게 취미를 가져보라고 쉽게 이야기 하지만 평생 되지 않았던 것이 갑자기 잘 될 리가 없다. 아니면 그냥 이런 성향인 거겠지. 그냥 무언가에 진득하게 빠지지 않는 사람. 분명 나 같은 사람도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어느 것 하나에 오래도록 미친다는 것, 열정에 넘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한다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아름답고 부러운지 모른다. 오랜 시간 덕질을 하는 사람들은 분명 행복한 사람들이다.


현재, 나는 아직도 덕질할 수 있는 취미를 찾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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