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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막얼음 Apr 25. 2021

(1) 미네소타, 낯선 땅에서 눈 뜨다

청소년기 미국 유학생활의 뒤늦은 기록

서문

[영화 미나리를 보고 나니 나 역시 오랜 시간 외면해왔던 다르지만 비슷한 흐릿한 기억이 있다. 당시의 기분이 떠올라 가슴 깊은 곳이 아려오지만 시린 사춘기의 기억일지라도 지금 글로 남겨 놓지 않으면 정말 없었던 일처럼 사라져 버릴 것 같아 용기 낸다.]





울리지 않았으면 하는 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찢어지게 들린다. 안개 낀 듯 머릿속이 몽롱하다. 알루미늄 블라인드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서늘한 공기가 코 끝을 감싼다. 이불속에서 내 체온으로만 온전히 데워진 자리를 조금이라도 벗어나지 않으려 자세 하나 바꾸지 않은 채로 눈꺼풀만 힘겹게 올려본다. 예상했던 암흑뿐이다.

 

침대를 벗어나 카펫 위로 몇 발자국만 내딛으면 보이지 않아도 어디에 위치한 줄 아는 의자에 걸려있는 카디건이 있다. 갓 태어난 기린처럼 중심이 잘 잡히지 않지만 일단 집어 몸에 두른다. 방 바로 앞에 위치한 화장실, 하나밖에 없는 누런 빛 조명을 켜고 세면대 거울로 졸린 눈의 한 영혼을 바라본다. 어차피 조명이 어두워 얼굴을 세세히 들여다보려야 잘 볼 수도 없다.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칫솔질을 하고 차가운 물로 얼굴 근육을 깨운다. 조금 정신이 차려지는 듯하다. 방으로 돌아와 백과사전 같은 두꺼운 책 3권을 한 권씩 들어 몸 두께보다 넓은 등산 배낭에 차곡차곡 넣는다. 쿵. 쿵. 쿵. 조심을 한다고 했는데도 소음이 안 생길 수가 없는 무거운 책들이다. 층간소음 같은 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 집은 여름날에 거실 통창을 열어놓으면 가끔 다람쥐도 놀러 오는 1층이다.


체온을 최대한 보호할 수 있는 따뜻한 니트와 스키니 청바지, 어제도 입었던 타이트한 숏 패딩을 교복처럼 꺼내 입는다. 미리 우유를 부어놓은 시리얼을 마시다시피 입에 흘려 넣은 다음 쫓기듯 종아리까지 오는 어그부츠를 신고 배낭을 어깨에 멘다. 책 무게 때문에 중심이 뒤로 쏠려 넘어질 듯 하지만 익숙하게 몸을 앞으로 젖힌다. 엄마가 졸린 눈으로 어제 미리 준비해놓은 런치박스를 건네주면서 잘 다녀오라고 배웅해주신다. 아빠는 주무시다 우리의 대화를 들었는지 안방에서 잠긴 목소리로 원격 인사를 건넨다. 무표정으로 인사에 답하고 현관을 나서자마자 늦을 것 같은 두려움이 앞선다. 생각보다 단단한 어깨뼈가 배낭을 지탱해주지만 걸을 때마다 발로 전해지는 충격이 기분 나빠 차마 달릴 수도 없다.


아무도 없는 회색 카펫이 깔린 긴 복도를 경보하듯 지나면 아파트 현관을 나설 수 있다. 반대쪽 현관 쪽으로 나가면 수영장과 호수가 있어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항상 이 문으로 나선다. 1미터 정도 높이의 눈이 양 옆으로 쌓여 있지만 제설작업이 잘 되어있어 내가 걸어갈 길은 아주 깨끗하다. 오른쪽으로 몇 발자국 걷자마자 차가운 바람이 뼈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아 몸을 더 웅크려 비집고 들어올 수 있는 옷의 모든 구멍을 최대한 막는다. 아무도 없는 주차장을 지나 직진해 2분 정도 걸어 나가면 큰 길이 나온다. 고속도로가 가까워 그런지 Highway 36 Drive라고 붙여진 명칭의 도로에 도착해 멍하니 서서 하얀 세상의 지평선을 바라본다. 현관문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어두웠던 세상이 서서히 어두운 남색 빛을 띠면서 아침이 밝아온다.


불현듯 오렌지색 아이팟 나노를 꺼내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한국에서부터 담아온 언니의 플레이리스트 그대로에 내가 추가한 몇 곡이 담긴 리스트를 랜덤 재생한다. 첫 곡인 드렁큰타이거의 편의점이 끝나고 두 번째 곡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저 멀리 노란색 스쿨버스가 보인다. 빨리 올라타서 몸을 녹이고 싶다. 미국에 오기 전까지는 투니버스 만화 채널에서만 보던 차 었는데 지금은 그 차량의 계단을 내가 올라서고 있다.


버스에 올라서니 두 명 정도가 이미 각자 다른 위치에 거의 누워있는 자세로 앉아있다. 스쿨버스는 2명씩 앉을 수 있는 좌석이 양 옆으로 12줄이 있어 꽤 큰 차량에 속한다. 모두가 웬만하면 혼자 앉는 것을 선호한다. 나도 중간 위치쯤 되는 좌석에 가방과 함께 털썩 엉덩이를 붙인다. 가방에 들은 책의 두께 때문에 엉덩이가 간당간당하게 좌석 위에 걸려있는 느낌이라 귀찮지만 어쩔 수 없이 가방을 옆으로 내려놓는다.


기사는 능숙하게 큰 버스를 제어하며 이리저리 핸들을 돌린다. 앞 쪽에 위치한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할 때마다 코스 요리처럼 다양한 인종의 학생들이 차례대로 버스에 올라탄다. 조용했던 버스 안은 학교에 다다를 때쯤이면 떠드는 소리로 시끄러워져 에어 팟 소리를 키우지 않으면 노랫소리가 묻힐 정도이다. 아침부터 뭐 이리 할 말들이 많은지 항상 목소리 큰 아이들은 정해져 있다. 나는 아침부터 머리를 돌릴 기력이 없다. 아무와도 말하고 싶지 않다. 영어 한 마디라도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들으려면 항상 집중해야 한다. 그저 한국어로 친한 친구들과 신명 나게 떠들고 싶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내가 왜 너희만큼 영어를 못하는지 내 정체성에 대해 궁금하기나 할까.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도 않고 불필요한 관계를 맺고 싶지도 않다.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면 가식적으로 웃으면서 친절하게 대답은 하겠지만.


버스가 학교 앞에 주차하고 The Black Eyed Peas의 Let’s get it started 노래를 마지막으로 정지 버튼을 누르면서 몸을 일으킨다. 나를 포함한 아이들 모두가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라가 있는 택배 소포들처럼 줄지어 기다리다 차례대로 버스에서 떨어져 나간다. 집에서 학교까지 자차로 바로 가면 12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를 스쿨버스로 여러 명을 픽업하느라 탄 지 30분 만에 드디어 해방된다. 중학교 정문이 석션처럼 아이들을 빨아들인다. 하루가 또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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