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사의 전문성
‘교과서가 없으면 어떻게 수업합니까 ?’
사회 교과 협의회 시간에 수업내용 및 방법에 관한 의견을 나누는 중 어느 교사의 반응입니다. 이 교사에게 핀란드 학교에는 꼭 가르쳐야 한다는 검정 교과서가 없을 뿐 아니라 교육 내용도 자율적으로 정한다, 또 같은 학년이라도 학교마다 다른 수업내용과 방식을, 같은 교실 안에서도 학생마다 다른 수업목표와 진도를, 학생들에게 무슨 내용을 어떻게 가르칠지를 스스로 결정한다는 얘기를 해주었더니 더 막막해 합니다.
수업 내용과 수업 방식, 교과 수업을 변화, 개혁하기 위한 핵심적 두 가지 요인입니다. 교사들과 수업방식에 대한 대화나 협의를 해 볼 때 가장 막막한 상황은 단지 교과서 지식을 전부로 아는 교사와의 대화입니다. 일부의 교사들이 교과서 지식 전달만을 수업의 주목표로 간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과지식 위주로 가르쳐야 하고, 교과서의 지식들을 전부 다 가르쳐야 한다고 하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는 교사들에게는 교과서가 바이블이기에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든지 그 지식들을 알게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교과에서 가르치는 내용들이 너무 많다 보니 대부분의 지식들이 깊이 알지 못하고 스쳐 지나갑니다. 단지 시험 때 잠깐 다시 모아지다 다시 흩어집니다. 쌓아지지 않습니다. 워낙 많은 지식들을 꾸겨 넣다 보니 깊이 생각하고 소화해낼 수 있는 여유가 없습니다.
그동안 수차례나 교육과정이 바뀌었습니다. 시대적 요청에 의해 변화된, 바람직한 인간상을 제시하고 교육에서 길러내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교육과정이 자주 바뀌어본들, 교육과정에서 어떤 인간상을 추구하든 교사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교사들은 교육과정을 보고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오직 교과서만 보고, 교과서에 맞춰서 가르칩니다. 교육과정이 바뀔 때마다 전 교사들에게 개정 교육과정 관련 두툼한 책자를 나눠주고 있지만 교사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교육과정에서 어떠한 변화, 노력을 할지라도 교과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교사들은 교육과정의 복잡하고 성가신 내용, 과정들을 알 필요도, 따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교과서만 가지고 내용 전달에 주력하기만 하면 됩니다. 결국에는 교육과정이 강조하는 인간상보다는 교과서 지식 전달이 최우선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것이 우리 교사들의 현실입니다.
심지어 교과서, 더 나아가 문제풀이만 열심히 가르치기만 하면 됐지 왜 의미 있고 다양한 활동들을 해야 하는지 의문을 품기도 하는 교사도 있습니다. 지식 주입을 통하여 정답 찾기만 제대로 하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 교과서 지식이 절대적 영향을 발휘하는 시험이라는, 그리고 수능이라는 더 큰 강제적 틀인 존재하는 한 어쩔 수는 없다고들 할 수 있습니다. 입시, 특히 수능이라는 든든한 방어막을 통하여 ‘교과서 위주의 획일화 교육’이 완벽하게 합리화됩니다.
따라서 교과서에만 의존한다고 해서 잘못된 수업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우리나라가 IMF 위기를 격은 이유 중에 하나 암기 위주의 지식 교육으로 성장한 엘리트들이 문제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미처 대처하지 못한 결과라는 지적을 받았다고 언급했습니다. 이처럼 문제는 그 교과의 모든 지식을 다 알아야되는 것처럼, 그리고 교과서에 있는 지식만이 정답인 것처럼 교과서의 잡다한 지식들을 꾸겨 넣기에만 주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학기에 10개가 넘는 교과들에서 수많은 지식을 때려 넣습니다. 그리고 교과서 내용만에 한정된 시험에 의한 한 줄 세우기식 평가가 뒤따릅니다. 교과서에 있지 않으면 정답이라고 보지 않는 ‘정답 찾기’ 식 교육만 강요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시험때만 되면 웃픈 사례가 자주 발생합니다. 고등학교에서는 매 시험 때마다 교사들은 아이들로부터 곤욕스러운 공격을 받습니다. 1점이라도 더 받아내려 기를 쓰는 아이들과의 시험문제 정답에 대한 논란입니다. 표현 하나하나 완벽하게 커버해야 하는 도덕이나 윤리시험뿐만 아니라 다른 교과들, 특히 영어 같은 교과도 곤욕을 치릅니다. 영어샘은 문법 원칙 그대로를 준수하려고 하고, 외국에 살다 온 아이들은 이런 영어도 쓴다는 식, 또는 이런 답도 가능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교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는 ‘교과서에는 없는 내용이다’라는 말을 뇌까리는 것뿐입니다. 교과서에 있는 정보와 현실과의 차이로 인한 오류도 있습니다. 세계지리 수능시험에서 한 학생이 1년여 소송을 이끌어서 승소를 한 적이 있습니다. 교과서에는 2010년도까지 통계가 나와 있었고, 수능시험에 나온 것은 2012년도 통계입니다. 교과서에는 최신 통계가 없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교과서로만 배웠고, 교과서 내용만 정답으로 인식하는 아이들이었기에 할 수 있는 당연한 항의였습니다. 최근에는 수능 문제 오류에 대하여 수험생들이 법원에 소송을 내고, 미국 명문대의 석좌교수에게까지 문의를 해 이긴 적도 있습니다. 현실과 괴리된 교과서 지식에만 얽매여 있는 교과서 위주 수업과 시험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오늘도 시험문제 출제 오류로 재시험을 본다는 학교들에 대한 기사가 떠오릅니다. 어느 학교에서나 시험 때마다 시험문제 오류로 인하여 재시험이 빈번합니다. 정해진 시험범위, 교과서 내용에 한정하여 정해진 정답 찾기를 해야 하는 학교 시험 문제 출제는 교사들에게도 만만치 않은 작업입니다. 전문가들이 합숙하며 내는 수능 문제에서도 정답에 대한 논란이 항상 있어왔던 것처럼 단위 학교 시험에서야 더 말할 나위 없습니다. 나도 시험지를 최종 넘기기 전에 몇 번씩 검토하지만 시험이 끝난 후 아이들의 지적에 뜨끔할 때가 자주 있었습니다. ‘아, 그렇게도 볼 수 있겠구나.’하는 깨우침입니다. 교과서에 한정된 시험문제의 모순을 발견하는 아이들의 눈은 더욱 매섭습니다. 교육청마다 특별 연수를 진행하고, 방지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하지만 '교과서 내용 한정'이라는 우스운 틀이 우선인 한 과연 가능할까요?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내신 성적을 위하여 학원을 갑니다. 왜 학교에서 배운 대로 보는 시험만을 위해 학원을 갈까요? 교과서에서만의 내용을 가지고 내는 객관식 시험문제는 교과서가 바뀌지 않는 한 몇 년 쌓이면 뻔합니다. 그렇다고 교사가 엄청난 사고력을 발휘해서 시험문제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당연히 주변 학교들 시험 문제만을 가지고 연구하는 학원은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해당 학교 기출문제만 연구해서 풀어주면 충분히, 쉽게 아이들의 시험 성적을 올려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아이들이 학교 수업을 등한시하고 학교 끝나고 학원으로 가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아이들로 하여금 학원을 가게 하는 것도 교사의 책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과서만을 가지고 수업하는 ‘교과서의 우상화’로 인하여 발생하는 모순입니다.
노력하는 교사들의 다양한 교수방법 시도가 실질적으로 교육현장에 자리 잡지 못하고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도 수업 방법과 평가 방법이 모두 대학입시제도라는 틀안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즉, 수업방법의 다양화를 꾀할지라도 결국은 평가 방식에 의한 여러 가지 제약조건들이 발목을 잡고 있기에 교과서를 벗어날 수없는 우리 교육의 불가피한 현실입니다. 무엇보다도 교과서 전체를 학습하지 않고서는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없는 각종 시험, 즉 전국적이고 획일적인 성취 수준 평가 및 학교 내 시험, 특히 수능 등의 제도에 대비하기 위하여 공통적인 내용의 암기가 요구되고 있고, 상급학교 진학을 할 수 있으니 이에 맞춰 준비를 해야 합니다. 소위 시험의 범위가 정해져야 하니 범위를 한정 짓는 교과서가 있어야 하고, 교과서 안의 내용을 벗어나면 안 되니 학교에서는 교과서의 모든 내용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철저히 가르쳐야 합니다. 이러니 수업 시간에 교과서만을 가지고 주입식으로 강의하고, 문제집으로 수능 관련 문제를 푸는 것이 수업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대다수인 것도 사실이고, 이들 덕분에 교과서만으로, 문제집만으로 수업을 메꾸고 있는 교사들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결과적으로 교사들에게도 교과서의 내용을 전부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수업이라는 활동이 충분하다는 마인드로 무장시켜 버리는 부작용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교과서 지식의 우상화 교육, 즉 교과서를 절대적이고 유일한 교육수단으로 섬겨야 하는 현실에서는 없는 것보다 못한, 오히려 역기능이 더 큰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 학생들이 겪는 학교 부적응과 관련된 여러 문제들 중 일부가 교과서 위주의 수업방식에 기인한다고 보면 문제의 심각성은 더 커집니다. 국내의 어느 연구에서 우리나라 중·고생의 35% 이상이 수업 중에 매일 1시간 이상 엎드려 자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우리가 보다 유의미하게 받아들여야 할 결과는 엎드려 자기 시작한 시기로서 응답 학생의 가장 많은 비율인 30% 이상이 ‘중학교 1·2학년부터'라고 답한 것입니다. 이는 초등학교 때 다양한 수업 방법과 자료로 흥미롭게 학습해 온 아이들이 많은 교과 내용과 교과서 위주의 강의식 수업 방법으로 진행하는 중학교에 들어와 더욱 흥미를 잃게 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교과서 위주의 수업 방식은 학업 부적응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교과서 수업이 재미가 없는 이유는 교사의 내용 전달 위주의 수업방식과 더불어 교과서 내용 자체가 재미가 없거나 실생활과 관계없는 내용들, 그리고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즉, 학교 부적응 문제들 중 일부는 교과서 위주의 수업으로 인하여 수업에 대한 흥미 상실, 시험만을 위한 무의미한 공부에 대한 회의, 과도한 학습량에 지쳐 나타나는 반항 등입니다. 그리고 공부 자체에 대한 반감과 회의감을 품게 됨으로써 학습부진을 가져오고, 이는 다시 학업에 흥미를 잃게 되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학업에 대한 싫증에서 기인한 비행을 저지르고, 이런 아이들에게 교사의 처벌이 가해지고 결국 학교를 거부하게 되는 현상까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정신적 고통, 가출 충동까지 유발하기도 합니다. 교사들도 아이들의 이러한 상태를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AI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은 왠만한 정답은 물론 새롭고 창의적인 답안, 보고서까지 창출해내고 있는 시대입니다. 참고로 노벨 물리학상까지 탄 ‘AI 대부’ 제프리 힌턴 교수는 대학때 수학에 재능이 없다며 철학과, 그 다음 심리학과로 전과하지만 결국 학교를 떠나 목수일로 전전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분야에 위대한 업적을 쌓은 사람이라고 그 분야의 모든 것을 처음부터 완벽하게 알고 있다는 것은 아님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우리 학교에서의 수업은 아직도 교과서의 지식이 전부인양, 그리고 교과서에 한정된 단편적인 지식 암기와 정답 찾기만이 최고인양 매달리고 있습니다. 교육과정이 아무리 잘 개정되어도 ‘교과서만의 우상화’에서 탈피하지 않는 한 통찰, 그리고 창의성을 기대할 수 있는 학교 수업의 변화는 기대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