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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ape Lim Jan 28. 2024

박사 3년 졸업 하기 (1):
'논문'에 대한 이해

'논문 쓰기'를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글을 열기 전, 먼저 부족한 저를 3년만에 졸업시켜주신, 저의 지도교수님이신 명현 교수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연구 논문 작성법 관련해서 학부생 4학년부터 석사 1년차까지를 대상으로 하는
세미나를 초청드리고 싶은데요,"



  나를 좋게 봐주시던 K대의 한 교수님께서 학부생 고학년들과 막 대학원에 입학한 학생들을 위해서 갓 졸업한 파릇파릇한 박사로서 연구 논문 작성법에 관해 조언을 해줄 수 있겠느냐 하고 요청을 받았다.


  KAIST 전자과는 석사 과정 때 윤준보 교수님의 '연구 논문 작성법'이라는 과목을 필수 과목으로 이수하게 되어 있다. 대학원에 막 진입한, 아무것도 몰랐던 나에게 성공적으로 대학원 생활을 하는 법에 대해 윤준보 교수님께서 열심히 설명해 주시고 조언을 해주셨던 게 5년이 지나도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 있다. 필수 과목이라 자의 반 타의 반 듣기는 했지만 막막한 대학원 생활에 한 줄기 도움이 되었던 기억이 있어서, 나 또한 후대 연구자의 첫 시작을 도와주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흔쾌히 세미나를 하겠다고 승낙했다.


  하지만 승낙하고 나서 어떤 말로 세미나를 시작해야 할지,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막막함만이 가득했다. 다들 그렇듯이, 대학원생의 삶이란 것이 하루살이처럼 하루 벌어 하루 연구하며 살지 않던가(?)...

 

  그래서 나는-거창한 제목을 붙였지만- '논문'이란 결국 무엇인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여 세미나를 하고 왔었다. 이 문장은 내가 석사 시절 논문 작성에 대해 막막해하던 시절, 박사 학위를 27세에 받은 동아리 선배가 해준 말이었는데, 나에게는 큰 '아하 모멘트'가 되었다. 실제로 이 문장은 내가 박사를 3년 만에 졸업할 때까지도 크게 도움이 되었는데, 추가로 내가 깨달은 것을 토대로 약간 수정하여서 정리해 보았다. 




  각설하고, 내가 정의내린 '논문'은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현재 시대의 연구 동향을 고려하여, 실험적 증거에 입각한 나의 생각을 주장하는 글"


  이 문장이 '뭐야, 너무나 당연하잖아?'라고 생각하신다면, 당신은 연구에 대해 이미 깨달은 자이기 때문에 아래의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 만약 위의 말의 뜻이 무엇인지 궁금한 이라면, 아래의 부연 설명을 차근차근 읽어보고 곱씹어 보면 필히 대학원 생활에 큰 도움이 되리라. 



1. 현재 시대의 연구 동향을 고려하여

  먼저 첫 번째로는, 21세기에 벌어지고 있는(혹은 벌어졌던) 사전 연구를 철저히 반영해야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다시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하나의 예시를 들어 설명해 보자. 우리가 포크와 나이프를 결합한 '나포키'라는 것을 제안한다고 가정해 보자 (혹 공학 분야가 아닌 이도 이해할 수 있게 쉽고 직관적인 예시를 위해 괴상한(?) approach를 만든 점을 양해해주길...). 그러면, 우리는 이 나포키란 것을 포크보다 더 잘 찌를 수 있다고 주장해야 할까? 한 손으로 음식을 썰 때, 나이프와 비교했을 때 적은 힘으로 더 잘 썰 수 있다는 것을 피력하면 좋을까? 혹은 이와 유사한, 스푼과 나이프를 합친 스포키보다 우리의 나포키가 음식을 먹을 때 더 편하다고 주장해야 하는 것이 좋을까?


  위의 예시를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첫 번째 메세지는 'related works 조사를 철저히 한 상태에서 기존에 존재하던 연구 중 어떤 방법론이 우리가 제안한 방법과 비교되어야 하는지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논문을 처음 쓰는 대학원생이라면 related works 부분을 억지로 꾸역꾸역 작성하기만 하면 된다고 착각하기 쉽다. 왜냐하면 대체로 독자의 관점에서는 이미 아는 내용이기 때문에 related works를 안 읽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문에서 이 related works 부분은 우리가 제안하려고 하는 논문과 기존의 논문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즉 어떻게 related되어 있는지) 명시적으로 언급해주면서, 이와 동시에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게 기존 논문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밝혀 주는 역할을 한다. 이를 논문의 '포지셔닝(positioning)'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 포지셔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똑같은 연구를 하더라도 related works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위의 예시로 돌아가서 설명하자면

Case A) 만약 우리가 나포키를 제안한 것이 스테이크를 더 잘 썰기 위해서 제안한 것이라면, related works에 '스포키는 숟가락과 포크를 결합한 식기의 형태를 뜻하는데, 하나의 식기로 두 가지 기능을 지닌다는 점에서는 우리가 제안한 나포키와 유사한 철학을 공유하고 있지만, 이는 음식을 썰기 위한 식기는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존의 스테이크를 썰 때 사용하는 나이프의 한계점을 개선한다'고 related works에 작성해야 한다. 

Case B) 만약 우리가 나포키를 제안한 것이 하나의 식기로 찌르기와 썰기 두 가지 기능을 지닐 수 있다는 잠재력을 주장하고 싶었다면, 이 경우에는 '스포키는 숟가락과 포크를 결합한 식기의 형태를 뜻하는데, 하나의 식기로 음식을 찌르거나 국을 떠먹을 수 있는 등, 놀라운 편의성을 보여주었다'라고 related works에 작성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지 이 두 가지 기능을 하나의 식기로 결합하는 아이디어의 당위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똑같이 나포키를 제안했음에도, 왜 나포키를 제안하려고 하는 지에 따라서 related works에 적어야 하는 내용이 달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이러한 철저한 사전 조사를 통해 기존 연구들 중 정말로 내가 제안하고자 하는 아이디어가 다른 연구자들이 하지 않았는가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즉, 포크와 나이프를 결합하려는 시도가 없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처음으로 시도한 줄 알고 실험도 다 하고 논문도 다 썼는데, 막상 기존에 이러한 도구를 '포크나이프'라고 명명한 연구자가 있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연히 이 주제로는 논문을 내는 것이 쉽지 않아질 수 있다. 

 

 페터 빅셀의 '책상은 책상이다'라는 소설을 다들 읽어본 적이 있는가(나의 교육 과정에서는 필수였던 단편 소설인데, 요즘 Gen Z 친구들은 아는지 잘 모르겠다)? 대충 내용은 아래와 같은데: 

"언제나 똑같은 책상, 언제나 똑같은 의자들, 똑같은 침대, 똑같은 사진이야. 그리고 나는 책상을 책상이라 부르고 사진을 사진이라고 하고, 침대를 침대라고 부르지. 또 의자는 의자라고 한단 말이야. 도대체 왜 그렇게 불러야 하는 거지?"
"이제 달라질 거야." 이렇게 외치면서 그는 이제부터 침대를 '사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피곤하군, 사진 속으로 들어가야겠어."
-「책상은 책상이다」 中


  논문에서는-마치 사람들이 이미 '침대'라고 명명한 것을 '침대'라고 불러야 하듯이-기존에 다른 연구자들이 한 연구를 기반으로 하여 쓰는 글이기 때문에, '포크나이프'라고 이미 정의된 개념을 독자적으로 '나포키'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이는 위의 글처럼 '침대'를 '사진'이라고 부르는 어리석은 행위와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에는 약간 방향을 틀어서 나포키 자체의 novelty를 주장하기보다는 기존의 포크나이프와의 차별점을 더 심층 깊게 다뤄서(예로 들어, 기존의 포크나이프는 칼날 하나 + 3날 포크였다면, 칼날 하나 + 4날 포크가 더 좋다든가 하여 4(four)크나이프로 이름을 짓는다던가...작명 센스 ㅈㅅ) 기존 연구와와 구분 짓는 것이 중요하다.


2. 실험적 증거에 입각

  두 번째로는, 논문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에 대한 실험적 뒷받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있는 분야가 공학 쪽이다 보니 특히 정량적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다. 즉, 아무리 우리 아이디어가 우수하고 차별점이 있다고 introduction에 명필로 작성했다 하더라도, 실험이 빈약하면 논문은 reject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잘못 알아듣고 무조건 실험을 많이 넣으면 넣을수록 좋다고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된다(물론 많으면 좋긴 하다. 리뷰어 입장에서 뭔가 노력이 가상하다고 생각이 들 때도 있기 때문).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은,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실험이 충분히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로 들어서 위의 case A처럼 잘 썰기 위해 나포키를 제안했는데, 실험에서는 정작 포크보다 더 잘 찌르는 것에 대한 분석만 있으면 reviewer 입장에서는 '뭐야, 주장이랑 연관없는 이상한 데이터가 있네?'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나의 23년도 이후 논문들을 보면,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주장과 실험 결과를 딱딱 1:1 매칭되게 정갈히 글을 쓰려 노력하는 흔적들을 볼 수 있다:

(원문은 [여기]에)


3. 나의 생각을 주장하는 글

  위의 글을 읽으면서 '설명'이라는 단어보다는 내가 '주장'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이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결국은 논문은 주장을 펼치는 논설문이라는 것이다. 논문을 투고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대체로 논문 == 실험적 증거에 입각한 논설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논문 == 우주의 진리를 담는 글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꽤 많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의 주장 != 우주의 진리가 아닐 수 있음을 받아들이되, 현재 내가 분석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나의 주장을 뒷받침만 잘 한다면, 논문을 게재하는 것이 몹시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이 #3을 뒷받침해 주는 사례로는, 21세기 관점에서 명백히 틀린 가설인 천동설이나 에테르 이론도 그 당시에는 실험적 증거들을 통해서 입증되었다는 점이다:   

“17세기까지도 천동설이 받아들여진 이유는 천동설이 세계를 잘 설명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갈릴레오의 정밀한 관측이나 케플러의 복잡한 타원 궤도 계산이 없었다면 지동설을 지탱하기 어렵죠. 빅뱅 이론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도 우주가 최초에 터지는 순간을 보진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분명한 건 모든 과학적 방법은 실험적 증거에 입각한다는 점입니다. 증거가 있는지 먼저 묻는 자세가 돼 있어야 하겠죠. 과학은 ‘믿어라’ ‘외워라’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그에 맞는 데이터는 언제라도 볼 수 있습니다.”

- 김상욱 경희대 교수님 인터뷰 중 일부. 출처: https://m.khan.co.kr/culture/book/article/201811231505001#c2b


  물론, 그렇다고 억지 주장을 펼치라는 말은 전혀 아니다. 하지만 일단 막막하다면, 어떤 주장을 할지 생각해 보고, 그걸 실험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지 #2를 진행해 보면 된다. 그러니 일단 무엇을 주장할지가 곰곰히 생각해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물론 주장을 하기 위해서 앞의 #1과 #2를 반복하다 보면 자신의 주장이 불충분하거나, 이미 제안된 방법이거나, 혹은 기존에 있는 방법보다 비효율적일 것임을 스스로가 깨닫고 좌절하는 과정이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그것을 이겨내는 것이 연구다.


  즉, 이 세 가지 요소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고 세 가지 조건을 동시에 만족하도록 논문을 쓰는 것이 연구의 근원이자 본질이며,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을 때까지 불굴의 의지로 중꺽마 자신의 주장을 재수정하고 실험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라고 볼 수 있다.



 

 쓰다 보니 굉장히 길어졌지만, 결국 연구라는 것은 아래의 짤 하나로 정리될 수 있다. 나의 예측 (Hypothesis & Prediction) → 예측이 맞는지 실험을 통한 검증 (Experiment & Result) → 실험 결과가 내가 생각하는 바와 다르게 나오거나 SOTA 방법론보다 좋지 않음 (Reject Hypothesis) → 수정된 예측으로 다시 실험....의 반복이 결국 연구자의 삶이 아닌가 싶다. 

 


오늘의 끄적거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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