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3일의 기록>
오픈채팅방은 항상 시끌시끌하다.
나는 부산전세사기 오픈채팅방 하나와 그중에서도 임대인이 같은 피해자들이 모인 채팅방 하나, 총 2개에 초대되었다. 변호사를 통하지 않고 셀프로 법적 조치를 하는 분들도 많아서 유독 법률자문을 하는 글들이 많다.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지만, 심지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전세피해자라는 공통점 하나로 채팅방은 굴러간다. 피해자 중에서도 법률에 해박한 분이나 이미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선배님? 들이 있으니 이제 막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해줄 수 있다.
감정적인 글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힘내라는 위로도 없다. 다들 궁금한 부분을 물어보고 답변이 달릴 뿐이다. 가끔 임대인을 욕하는 분들이 있긴 하지만.
법률 자문 내용은 소송하는 방법, 소송 진행 상황, 내용 증명 쓰는 법, 임차권 등기하는 법 등 다양하다. 사실 이런 내용은 블로그를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오픈 채팅방은 광고가 없고 비교적 최근 정보이며 실제 피해자들이 알려주는 정보라는 것이 강점이다.
법률자문 외에도 전세피해 법률 개정이나 인터넷 기사 등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될 내용들이 올라온다.
현재 법으로는 임대인이 사기를 치려는 의도가 없었고 실제로 돈이 없는 상황이라면 보증금을 돌려받기 어렵다. 경매를 통해봐야 깡통전세니 남는 돈이 없고, 다른 재산도 이미 명의를 돌려놓았을 테니 압류도 어렵다. 소송 결과가 10년 동안 유지된다고 하니 그동안 임대인에게 다시 돈이 생기면 모르겠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연락이 없었지만, 다른 피해자들이 채팅방에 공유한 정보에 의하면 임대인이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변호사와 함께 출석했고 그동안 임대인들이 협박을 할까봐 연락을 받지 않았으며 사기 행위가 아니라고 말했단다.
보증금은 현재 돌려주지 못할 상황이라 임대인들에게 집을 매매하는 방법으로 해결해본다고 하는데. 이게 무슨 개뼈다구 같은 소리인지.
현재 이초빌의 보증금은 1억7천5백. 근저당은 1억 8천이다. 이초빌 매매가는 대략 2억 정도 예상되는데 내 보증금으로 근저당을 해결하고 우리에게 이초빌을 싸게 팔겠다는? 그럼 우리는 또 이초빌을 사기 위해 다시 빚더미에 앉게 된다. 심지어 그렇게 사는 것보다 경매를 통해서 매매하는 것이 더 저렴할지도. 아니 살 생각이 없다. 내 돈 돌려달라는데 왜 더 빚을 내서 집을 사라고하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지금 부동산 시장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예전에는 뉴스에서만 나오던 일들이 주변에서 심심찮게 나타나고 있다. 최근 유명 연예인까지 전세사기를 당했다며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야기할 정도다. 분명히 법적인 조치가 필요하고 정부의 지원이 필요한 상황인데 마땅한 대안이 없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정원이가 국민청원을 올렸다.
아래는 청원 내용 전문이다.
오늘 대한민국은 전세사기인의 천국, 임차인의 지옥이 되었습니다. 전세사기로 전 재산을 잃은 임차인은 극단적 선택을 하고, 뉴스에서는 인천, 부산, 대전, 대구 등 지역을 바꿔가며 대규모 전세사기를 보도하고 있지만, 각 지자체는 국민의 비난을 면하려는 임시방편 피해센터만 운영할 뿐입니다.
임차권등기명령 신청 건수가 2023년 한 해만 4만 5045건에 달하고, 전세사기피해자등으로 국토부에 결정받은 사람들만 1만944명입니다.
이 규모를 비단 개인의 부주의와 무지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이에 전세사기피해 관련 제도와 법안의 개정을 바랍니다.
1. 전세사기피해자결정 인정 등 전세사기특별법 개정
전세사기피해자등 결정에 필요한 서류(임대인의 파산선고·회생개시 결정문, 경매·공매개시 서류, 집행권원 등)를 최소한으로라도 준비하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피해자들은 최소한 임대인이 파산할 때까지, 혹은 경매와 공매가 개시될 때까지, 전세사기 수사가 시작될 때까지 기다리며 하루하루 피말라가고 있습니다.
● 전세사기피해자등 결정을 위한 신청 과정을 접수‧조사와 피해자결정 및 결과 송달까지 30일 이내로 신속히 진행해주십시오.
● 일부 서류는 추후 제출하더라도 전세사기 정황이 뚜렷하다면 적극적인 시각으로 결정을 먼저 검토해주십시오.
● 전세사기특별법의 신속한 개정을 통해 전세사기피해 선구제 방안을 마련해주십시오.
2. 사기죄의 형량을 기존의 두 배 이상으로 상향 조정
피해자는 보증금이라는 큰 재산을 잃고 앞으로의 삶을 절망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에 반해, 사기죄의 형량은 고작 10년입니다. 이번 인천 미추홀구에서 벌어진 전세사기에서도 4명의 피해자가 극단적 선택으로 유명을 달리했지만, 가해자는 법정최고형인 15년을 구형받았을 뿐입니다.
전세사기 피해 규모는 2000억(인천 미추홀 전세사기 추정), 180억(부산 전세사기 추정)에 달하고,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몇천 명 규모의 시민이 함께 겪는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약 10년 전 기사에 따르면, 고등학생 44%가 ‘10억을 준다면 죄 짓고 감옥 가도 괜찮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10년 전보다 더 나은 대답을 기대할 수 있는 사회가 맞습니까.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대규모 사건이 터질 때마다 우리 국회는 시대적 국민 정서를 반영하여 법을 고쳐왔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는 전세사기는 몇 백 가구, 몇 천 가구에 달하는 대규모이자 조직적인 범죄입니다.
● 올바른 사회적 정의를 위해, 피해 규모 대비 현저히 낮은 사기죄 형량을 지금의 두 배 이상으로 상향 조정해주십시오.
3. ‘깡통전세’ 방지를 위한 사전 대책 마련
‘전세사기 당하지 않는 방법’ 등 교육도 중요하지만 합리적인 위험이 예상되는 임대건물에 대해 임차인을 위한 최소한의 제도적 보호막이 필요합니다.
근저당으로만 채운 깡통매물 수백 가구를 보유한 임대인은 문제 발생 시 보증금을 모두 반환할 능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예견된 위험이 지금까지 묵인되어왔습니다. 임대인의 재산상황, 부동산 시장상황 등 문제 발생 시 모든 피해를 임차인이 오롯이 모두 떠안을 수밖에 없는 현재의 부동산 전세 시스템을 고쳐주십시오.
● 본인 거주용이 아닌, 임대를 위한 건물에는 기준에 따라 근저당 비율이 50%가 초과하지 않도록 법제화 해주십시오.
열심히 일해서 정당하게 재산을 모으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
가장 기본적인 삶의 진리를 믿고 안심하며 살아갈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한 달 동안 5만 명의 동의가 필요한데, 아직 1000명도 되지 않았다.
성공하면 좋겠지만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하고 싶다.
<2024년 2월 19일의 기록>
시간이 많이 지났다. 아직 진전이 없다. 임대인도 연락이 없다.
오픈 채팅방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실시간으로 채팅이 쌓여 이제는 한 번에 읽을 수도 없다. 알림을 꺼두었다.
국민청원은 2600명이 넘었다. 감사한 일이지만 5만 명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아마 실패로 끝나겠지. 피해자들만 동의를 해도 이보다는 더 많은 수일 텐데 역시 알리는 것이 쉽지 않다.
주변에서 전세사기를 당했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뉴스로만 보던 이야기들이 피부로 느껴진다. 올해는 작년보다 피해자가 더 많아진 전망이라고 한다. 며칠 전에는 내 친한 친구도 전세사기를 당했다. 그 친구는 보증보험을 들어 놓았지만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HUG에서도 보험으로 장사를 할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피해자가 많아지니 이리저리 꼬투리를 잡아 계약을 깨는 것이다. 친구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보였다. 그렇지. 제 정신일 수가 없지.
돈이 없어서 돈을 모아보려고 전세를 들어왔는데 그 희망이 무참히 밟힌 느낌이다.
애초에 부모 잘 만나서 세 따위 안 살아본 사람들은 겪지 않아도 될 불행을 우리는 돈이 없다는 이유를 겪어야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쉽게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2024년 3월 20일의 기록>
내 일상을 뒤집어 높았던 폭풍 같은 시간은 지나간 것 같다.
나는 다른 곳으로 이사 왔고 임대인은 아직 연락이 없다. 국민청원도 실패했다.
전세피해자결정은 아직 나지 않았고 소송도 진행 중이라 별 말이 없다. 지루한 시간이다.
전세피해자 단톡방에는 사람들이 더 많이 들어오고 있다. 그들도, 어쩌면 나보다 더 큰 폭풍을 맞고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니 내가 전세피해를 당했다는 것을 잊게 되었다. 문득문득 칼처럼 꽂히던 생각도 주기가 짧아지더니 이제는 뭉툭한 나무칼로 찌르는 것처럼 그리 아프지 않다. 좋은 건지.
보증금을 돌려받을 때까지 경주마처럼 달려갈 줄 알았는데 길이 끊기고 나도 지쳤다.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시간 동안의 이자까지 챙겨먹겠다는 포부는 사라지고 시간이 늦어도 괜찮으니 제발 그 돈만 돌려달라고 애원하고 싶다. 아니, 어쩌면 이미 받지 못할 돈이라고 마음 한구석에서 체념했는지도 모르겠다.
네 번째 이야기는 좀 늦을 것 같다.
앞으로 더 많아질 전세피해자들이 이 글을 보고 낙담하고 희망을 잃어버릴까 걱정이다.
하지만 희망을 갖고 크게 무너지는 것보다야 낫지 않나. 기다려보자. 네 번째 이야기에서는 좋은 소식이 들릴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