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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루 Mar 28. 2024

캐럴의 어떻게 살 것인가

Carol & The end of the world를 보다

2003년, 대한민국에 굉장한 MMO RPG 게임이 등장했다. 그 게임의 이름은 바로 “메이플스토리”다. 귀여운 캐릭터와 쉬운 조작법 덕분에 많은 인기를 누렸다. 나 역시 그 게임에 푹 빠져서 꽤 오랫동안 플레이를 했었다. 메이플스토리는 캐릭터 체력이 HP로 되어 있는데, 직업마다 기초체력의 격차가 매우 커서 마법사의 경우는 아무리 레벨업을 해도 전사 계열 캐릭터들의 HP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대신 마법사는 마법을 쓰니까, 타고난 MP(마나, 마법을 쓸 수 있는 힘)가 많아 나름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현실 세계에서도 내 에너지의 총량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의 기력과 정신력이 머리 위에 떠 있어서 한눈에 상태를 알 수 있다면, MBTI로 서로의 성향을 유추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알기 쉬워질 거다. 의외로 사람들은 타인이 나와 다르다는 점을 망각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HP와 MP의 양이 다 다른데 그걸 까먹고 행동할 때 우리는 배려가 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


나 같은 경우에는 성취감이 내 자아를 지탱하는 데 큰 힘을 쓰고 있다. 쳇바퀴 돌 듯이 굴러가는 삶, 능동적이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것, 아무리 애써도 같은 자리에 있는 듯한 느낌에 다른 이들보다 취약하여 데미지를 많이 입는다. 이 사실도 많은 진흙탕에 주저앉고서야 겨우 깨달았다. 머리 위에 내 상태를 표시하는 막대기 하나만 있었더라면 이 사실을 훨씬 더 빨리 알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다.


하지만 문제를 알기만 한다고 해결까지 되는 건 아니다. 직업에서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는 나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 해답은 공부에 있었다. 학창 시절에 죽어도 하기 싫었던 영어가 뒤늦게 내 인생에 찾아오고야 만 것이다. 처음에는 필요에 의해 공부를 시작했으나 영어 공부를 할 때면 내 안의 빈 공간이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고, 이제는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을 때 영어 공부를 한다. 그 때 만큼은 무성영화였던 내 삶이 다채로운 소리들로 채워지는 느낌이 든다.


영어 공부의 일환으로 최근에 미국 애니메이션을 봤다. <Carol & The end of the world>, 한글 제목은 <종말에 대처하는 캐럴의 자세>다. 2023년 12월에 공개된 작품으로 총 10부작의 짧은 넷플릭스 시리즈다. ‘Keppler’라는 정체불명의 행성이 추락하고 있는, 종말 7개월 전의 지구를 사는 ‘캐럴’의 일상을 담고 있다. 1년도 1개월도 아닌 7개월이라는 애매한 기간의 시한부 인생을 사는 캐럴은 42세 미혼의 내향적인 여성이다.


종말을 앞둔 사람들은 대부분 저마다의 쾌락을 좇는다. 캐럴의 부모는 24시간 내내 알몸으로 지내며 간병인과 다자연애를 하고, 캐럴의 자매는 여행을 다니며 길거리는 무법천지가 되었다. 교통법규를 지킬 필요가 없으니 술을 마시면서 당당하게 운전을 하고, 슈퍼마켓은 좀비월드가 된 것 마냥 털려버린 지 오래되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일하려 하지 않고, 공과금을 내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세상에서 캐럴은 밤에 잠이 오질 않는다.


캐럴의 가족들은 세상이 끝나기 전에 뭐라도 하라며 캐럴에게 서핑을 하라고 서핑보드를 선물하지만 캐럴은 영 내키지 않는다. 죽을 날을 받아놨으니 당연하다는 듯 쾌락만을 추구하는 게 캐럴에게는 당연하지가 않은 것이다. 그러다 그녀는 우연히 ‘루틴’으로 가득 찬 회사에 들어가게 되는데, 어느 날 문제가 생기자 캐럴은 총을 들고 다른 사람을 위협하여 그 문제를 해결한다. 그날 캐럴은 처음으로 편하게 침대에 누워 잠을 자는데, 이 장면이 내게 몹시 인상 깊게 다가왔다. 캐럴은 필사적으로 ‘일상’을 원했을 뿐이다.


이 작품의 Dan Guteman 감독은 이 작품을 “a love letter to routine”이라고 소개했다. 일상에 보내는 러브 레터라니, 아주 귀여운 표현이다. 죽음을 앞두면 누구나 여행과 파티, 사랑, 섹스, 마약, 음주 등을 방탕하게 즐길 거라는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이 작품을 너무나 예쁘게 잘 요약한 것 같아 아주 마음에 들었다. 사실 영어공부를 하겠답시고 자막 없이 감상하는 바람에 내용의 절반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역설적으로 그랬기에 이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캐럴의 차분한 음성과 조금은 단조로워 보이는 캐릭터들이 무성영화의 주인공처럼 보였고, 그들의 행동과 분위기에 더 많이 집중할 수 있어 좋았다. 단순히 지금을 잘살자는 뻔한 주제가 아니라, 어쩌면 나의 단조로운 일상도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다른 사람들이 즐기는 일이라고 나까지 그것을 원할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아 위로가 되었다. 사람마다 HP가 중요할 수도 있고, MP가 중요할 수도 있다. 또한 데미지를 받는 포인트가 다 다를 텐데 살다 보면 그걸 자꾸 잊는다. 그때마다 좋은 작품들을 보면 망각한 걸 깨닫게 하고, 내가 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같다. Carol은 올해의 첫 수확으로 제법 괜찮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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