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기획전 - 공간을 중심으로

by Alexey


2026.2.10 ARTHOUSE MOMO 19:50 ~ 21:49

<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 -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The Bitter Tears of Petra Von Cant> - Rainer Werner Fassbinder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전을 진행해, 전부터 보고 싶었던 <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을 관람하고 왔다. 이전에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사랑은 죽음보다 차갑다> 등등, 파스빈더의 영화를 보긴 했지만 따로 극장에 가서 본 적이 없었기에 이런 기회가 있을 때, 꼭 한번은 극장에 가서 관람하고 싶었다.


바로 먼저 <페트라 폰 칸트의 눈물>을 보면서 그의 영화 속, 선배들에게 받은 영향에 대해 생각해 봤을 때, 내 머릿속에 추려진 인물은 총 3명이었다. 브레송(Robert Bresson), 에릭 로메르(Eric Rohmer), 클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


먼저, 브레송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부분은 배우들의 연기다. 마치 브레송의 [모델]의 개념처럼 이 영화 속, 배우들의 연기는 절대 극적이지 않다.

‘네 모델들이 스스로 극적이라고 느껴서는 안 된다. - 출처.<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노트>’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연기 이론이라 일컫을 수 있는, 내부에서 외부로의 운동인, ‘메소드 연기’라기보다는 이 영화 속 배우들은 ‘외부에서 내부로의 운동’의 연기를 펼친다. 이 점이 브레송과 맞닿아 있고 상통하는 점이다.

분명 <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에서 ‘페트라 폰 칸트가 화내거나, 눈물을 흘린다던가’와 같이 캐릭터의 ‘감정의 고저’는 분명히 있지만, 그것과 ‘메소드 연기’와는 전혀 다른 말이다. ‘감정의 고저’와 ‘감정의 발원지’는 분명히 별개의 항목이다.(감정의 발원지에 따라, 관객이 배우에 동화되는 정도가 달라지고, 배우의 발화, 즉 ‘대사’가 차갑고 건조하다고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차가움 속에서도 감정은 파악 가능하다.)


이야기의 구조나 주제 속에서 유사점을 들 수 있는 감독은 ‘로메르’와 ‘샤브롤’이다. 로메르의 경우에는 도덕 이야기, 사계절 이야기 등등의 연작을 통해 여러 번 보여줬듯 그의 주제는 항상 ‘사랑’이었다. 사랑이라는 대주제 속에서 캐릭터들의 대화를 통한, 그들의 관계의 변화, 선택 등등을 보여줌으로써 내러티브를 이끄는 부분은 ‘로메르’와 ‘파스빈더’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파스빈더의 장편 데뷔작 속 <사랑은 죽음보다 차갑다>의 오프닝 크레딧 속에서 로메르, 샤브롤, 장 마리 스트라우브에게 감사를 표했듯이, 그의 영향을 안 받았다고 말하기가 더욱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파스빈더’의 영화가 ‘로메르’보다는 정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사랑이라는 주제 속에서 파스빈더가 탐구하는 주제는 ‘투쟁’이기 때문이다. 서동진 교수가 언급했듯, 계급 투쟁은 사랑이 아니지만, 사랑은 계급 투쟁이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더 사랑하는 자’와 ‘덜 사랑하는 자’는 구분되고, ‘덜 사랑하는 자’는 ‘더 사랑하는 자’와 평등해지기 위해서 계급 투쟁을 감행한다. 이런 부분에서는 ‘샤브롤’이 떠오르는데, 이걸 샤브롤 영화 속으로 대입해 보자면, ‘사랑’이라는 주제는 아니지만,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구분되고 계급 투쟁적이라는 점에서 그와 궤를 같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파스빈더의 영화는 이런 기존 감독들의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나갔는데 또 하나의 특이점이 있다면, 그는 주로 사회적 소수자를 다뤘다는 점이다. 동성애자, 외국인 노동자, 창녀, 노인 등등 그는 항상 사회 속 소외계층을 주목하며 현대 사회의 외로움과 소외를 다룬다. 지금 다루는 <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 또한 여성 동성애자를 주목하며 다루는 영화다.


본격적으로 들어가 보자면, 앞서 말했듯, 이 영화, <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은 ‘더 사랑하는 자’와 ‘덜 사랑하는 자’간의 계급 투쟁이 벌어지는 곳이다. 이런 계급 투쟁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지표는 ‘공간’이다. ‘페트라 폰 칸트’의 방 내부를 유심히 살펴보자. 그녀의 방은 2개의 층위로 나누어져 있다. 침실과 작업실. 페트라 폰 칸트의 공간은 ‘침실’이며, 그녀의 하인, 말린느의 공간은 침실보다 낮은 곳에 위치한 ‘작업실’이다. 이 공간은 다른 벽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저 계단을 통한 높낮이에 대한 분리로 나타나는 공간이다. 즉 이런 높낮이에 대한 분리로, ‘말린느’의 위치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구간이다. 우리는 ‘시도니에’와 ‘페트라 폰 칸트’의 대화 속에서 하나의 힌트를 더 얻을 수 있는데, ‘페트라 폰 칸트’가 ‘시도니에’에게 ‘말린느’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우리는 이 공간과 사랑 속 관계를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더 사랑하는 자 - 작업실, 덜 사랑하는 자 - 침실. 사랑이라는 관계 속에서 주종 관계가 명확하게 나타나는 공간 지표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뒤에 ‘카린 팀’과 ‘페트라 폰 칸트’의 관계 속에서도 연장되는데, ‘페트라 폰 칸트’는 ‘카린’을 ‘더 사랑하는 자’가 되어, 내가 ‘카린’을 사랑한다는 점, 그것을 과시하기 위해 친히 작업실로 내려가, ‘카린’을 위해 술을 직접 따르는 장면을 여럿 보여준다. 초반부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녀는 ‘말린느’를 시켜 술을 따르게 했겠지만 말이다. ‘페트라 폰 칸트’, ‘카린 팀’, 이 둘 인물이 한 프레임에 들어오는 신문 장면에서 서로의 격차를 더욱이 잘 보여준다.(페트라 폰 칸트 - 작업실, 카린 - 침실) 그렇다. ‘페트라 폰 칸트’는 ‘카린’을 사랑하게 되어, 결국 ‘말린느’와 같은 위치가 되어 버린다. 하지만 그 둘, ‘페트라 폰 칸트’와 ‘말린느’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이는 뒤에 후술할 계획이다.


그럼 공간의 구조 외에 두 번째로 눈여겨볼 만한 점이 있는 부분은 가구의 배치이다. 막이 바뀔 때마다 여러 번 가구의 구조가 바뀌는데 이와 같은 점이 메타포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점은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가구의 위치 이동은 바로 ‘침대’이다. 총 5막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카린’과의 첫 만남, ‘카린’과의 두 번째 만남, ‘카린’의 떠남, ‘페트라 폰 칸트’의 히스테리, ‘말린느’의 떠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속에서 ‘침대’의 위치가 변하는 것을 관객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면 침대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공간(가구)인가?


이는 ‘페트라 폰 칸트’와 ‘시도니에’의 대화 속에서 엿볼 수 있는데, ‘침대’는 ‘페트라 폰 칸트’의 남성적 재현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라 볼 수 있다. ‘페트라 폰 칸트’는 전 남편과 생활 속에서, ‘침대’라는 공간을 거부해 온 것을 알 수 있는데, 왜냐면 그곳만이 유일하게 남편이 자신의 사회적인 거세, 여성의 사회적 성공에서 벗어나 자신이 권위를 부릴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하지만 ‘페트라 폰 칸트’는 오히려 남성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기에, 자신이 가부장 사회 속 여성이 되기를 거부하고 남성이 되어 그 가부장의 권위를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시도니에’와의 대화 속에서 “전통적인 관습은 우리 둘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해”라는 말을 하며 자신은 그 관습 속 여성적인 자아를 탈피하고자 한다. 이를 다시 확인할 수 있는 대화는 ‘겸손’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부분인데, ‘시도니에’가 자신에게 ‘겸손’하라고 하자 거부하지만, 이후 그녀는 ‘카린’과의 대화 속에서 ‘카린’에게는 ‘겸손’이 필요하다고 언급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다시 한번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녀 자신은 ‘겸손’을 받아들이는 걸 거부하고 그걸 부과하는 입장에 서고 싶은 것이다.


다시 침대로 돌아와, 그녀의 남성적 자아의 재현이 추락한 것을 가장 잘 보여준 장치도 침대였다. 5막 중, 3막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카메라는 로우 앵글에서 바닥, 그림 벽지, 전화기, ‘페트라 폰 칸트’만을 보여주고 어느 가구도 더 이상 그녀의 침실에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없다. 또한 카메라는 뒤에 있는 작업실을 보여주고 있지 않는다. 그러다가 카메라는 결정적인 순간에 뒤를 보며, 작업실 안으로 옮겨진 침대를 보여주는데, 두 여성 마네킹이 성적인 행위를 하며, 이불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카린’이 떠남으로써 그녀 자신의 위치가 노예 상태가 된 것을, 남성적인 자아의 추락 상태를 확연히 보여주는 샷이다.


하지만 영화 제목도 그렇고, 이 영화를 끌고 가는 인물로도 그렇고, 초점이 맞춰져 있는 대상은 ‘페트라 폰 칸트’이지만, 타이틀 시퀀스의 문구도 그렇고 화면도 우리에게 계속 ‘말린느’를 인지하게 해주고, 실제 주인공은 그녀라는 무언의 언지가 숨어있다.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자면, 타이틀 시퀀스에서 ‘여기 말린느가 된 사람에게 바치는 발병 사례’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며, ‘페트라 폰 칸트’와 (말린느를 제외한)다른 인물과의 대화 상황 속에서 - 거리를 유지하게끔 하는 소격효과의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 즉, 말린느가 조명 받지 않아도 될 상황 속에서도 ‘말린느’가 샷 구성 속에 들어가 있다. 이는 분명 감독이 ‘말린느’를 여과해 배출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 존재하는 부분이다.


이를 위에 후술한다고 했던 부분과 연결하자면, ‘말린느’와 ‘페트라 폰 칸트’의 대비점을 확연히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선택들을 했다고 보인다. ‘말린느’는 ‘페트라 폰 칸트’와 다른 점을 생각해 봤을 때, 그녀는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말이 없는 존재이다. 이 부분, 즉 ‘말이 없다’는 부분이 중요한데, 이건 그녀가 하인의 위치에 있지만, 자신이 스스로 하인의 위치를 자처하며, ‘페트라 폰 칸트’에게 평등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페트라 폰 칸트의 5막에서의 말같이, “바라는 것 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이를 실제 실천하고 있는 자가 ‘말린느’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말린느’를 중간에 삽입해 그녀는 ‘바라는 것 없이 사랑하는 존재’임을 관객에게 인지시키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페트라 폰 칸트’는 ‘카린’에게 육체적인 아름다움과 자신에게 종속을 바라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이고.


또한 겉으로는 ‘페트라 폰 칸트’가 ‘주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독립적 자기의식을 가지지 못한, 오히려 그녀가 하인과 같은 존재라 볼 수 있다. 왜냐면 그녀는 그저 타인에 의해서만 존재 가능하고,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녀는 ‘카린’이 자신의 자아상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저 무너지고 홀로 설 수 없는 존재임을 4막 속 그녀의 히스테리를 통해 여실히 보여주지 않았나?(이는 헤겔적으로 볼 수도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말린느’는 자신에 대해서 실질적 주인이다. 그녀는 언제든 맘만 먹으면 떠날 수 있는 존재이고, ‘페트라 폰 칸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없어도 홀로 설 수 있는 존재이며, 그렇기에 그녀는 마지막에 ‘페트라 폰 칸트’를 떠난 것이다. 그녀,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복수, ‘페트라 폰 칸트’와 동등한 위치 속에서 그녀는 떠난 것이다.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은 그녀는 작업실에서 올라와 침대 옆에, 짐 가방을 던져두고 그 앞에서 짐을 싸는 장면 속에서는 작업실이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동등한 두 주체만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동등한 주체, 즉 평등이라는 투쟁을 완수하고 떠나간다.


‘여기 말린느가 된 사람에게 바치는 발병 사례’, 감독은 아마 말린느와 같은 사람에게 투쟁하고 싸우라고 이 영화를 바친 것은 아닐까? 우리 중 어쩌면 ‘말린느’와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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