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에 대해
같은 제목으로 시작하는 글인 만큼, 저번 글의 연장선상에 있다.
저번 글보다 오히려 자기고백적일지도.
'어찌 흐르는 물의 방향을 거스를 수 있는가.'
저번 글에서 함축적으로 담아뒀던 이 문장을 주제로 다뤄 볼 것이다.
어찌 흐르는 물의 방향을 거스를 수 있는가?, 이 말의 맥락적인 구조로 따져 보았을 때, 한 번 끊긴 인연은 이어질 수 없다고 체념하는 쪽에 가까운 표현이다. 그렇다면 왜 나는 관계에 있어서, 특히 자연스레 무화된 인연에 있어서 그리 체념적일까?
생각을 거슬러 거슬러 타고 올라갔을 때, 보였던 것을 함축적으로 말하자면 '만남의 두려움'이었다.
그렇다. 그러면 왜 나는 그들을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일까?
그들이 변했기 때문이다. 아니 변했을 것이다. 추측에 가까운 표현이지만, 그래도 틀림없이 확신한다. 그들은 변했을 것이다. 먼저, 나 자신 또한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인간의 산물인 언어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기 마련인데, 그 모태가 되는 인간이 어찌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과거에 인연을 맺었던(지금은 맺고 있지 않는) 타자는 시간 속을 거닐며 점점 다른 모습으로 나아가는데 나의 상상계 속 타자의 모습은 변하지 않고, 늙지 않게 된다. 즉, 현실 세계 속 타자와 상상계 속 타자의 불일치가 생성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내면 속 타자는 영원한 젊음의 초상이 된다. 부동성을 지닌 존재, 얼음덩어리 속 꽁꽁 얼어 있는 그를 꺼내려면 현실 속 뜨거운 그의 현존을 다시 마주치거나 불러내야 한다.
천천히 얼어가는 동안, 상상계 속 존재는 망각의 대상이기도 하다. 인간은 본래 어쩔 수 없는 망각의 동물이다. 그 망각은 타자의 변질을 초래하게 되는데 세 가지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를 신적으로 추앙하게 되거나, 추락시키거나, 소멸로 귀결된다.(앞선 두 가지는 부분 망각이라 볼 수 있지만, 마지막은 망각 그 자체다)
이 주제에선 이 세 가지 망각 중, 우리가 타자를 떠올릴 수 있는 망각인 '추앙', '추락'에 대해서 다룰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추앙'이다. 다른 어휘로는 '미화'라는 말이 있겠다. 통상적으로 자주 사용되는 격언에서 또한 이와 비슷한 맥락적 구조를 가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
현재성이 지니는 것들의 특징은 현재 자신의 생살갗에 직접 닿으며 찌르는 고통, 아픔, 괴로움이지만, 회상은 과거 나를 찔렀던 바늘들은 현재로 옮겨와 사라지고 그 바늘들이 찔러놓은 딱딱한 굳은살만이 남겨져 있다. 우리는 현재성의 부재, 나를 극심히 찔러댔던 바늘이 사라지고 없는 상상계 속 과거(실제 과거는 아니다. 실제 과거는 현재의 현실과 똑같이 같은 바늘들로 찔리고 있었을 뿐)를 현재보다 낫다고 망각하게 된다. 실제 과거가 아닌 상상 속의 과거일 뿐인데.
타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분명 그 타자들이 내게 주는 충만감과 행복이 분명히 있었겠지만 나를 찌르는 그들의 말이나 행동들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내 머릿속 상상계 속에는, 그들은 오로지 내게 충만감, 행복 그리고 아름다움으로만 기억이 되며 나로 인해 계속 추앙되고 있다.
만약 현실 속 그가 나에게 다가오면 추앙됐던, 신처럼 군림했던 그는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오길 마련이다. 아마 나는 그 간극이 무서웠던 것일 것이다. 신의 죽음라 일컬어질 수 있는 상상 속 그대의 죽음을 말이다.
(여기서 간극은 타자에 대한 나의 시각에서의 간극이다. 우리는 결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 순 없지만, '나'의 시각에서 타자의 간극이 보인다면 우리는 절망에 빠진다)
다음으로 '추락'이다. 위에 분명, 그들은 오로지 내게 충만감, 행복 그리고 아름다움으로만 기억된다고 했지만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 이 경우가 바로 '추락'이다. 내 자아가 견딜 수 있는 정도의 상처를 만들었던, 그리고 그 상처가 굳은살이 될 수 있었던 상처와는 달리, 사무라 코이치가 말했듯, 다신 회복할 수 없는, 시간과 함께 상처의 골이 한없이 패이는 상처, 육체가 사라지고도 남는 상처를 남긴 타자는 내 상상계 속에서 추앙되지 않고 한없이 추락한다. '추락'은 '소멸'과 달라, 기억의 저편으로 보내어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아닌, 나의 상상계 속의 위계에서 그는 인간의 지위를 박탈 당한다. 계속해서 상상 속의 그를 곱씹으며, '추앙'에서 타자를 신격화하는 것과는 반대로, 그를 '물성화'시킨다. 타자를 물성화시킨다는 것은 현대의 인간 사회 내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차별이자 형벌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상상계 속의 그에게 기다려지고 있는 건, 시간에서도, 깊이에서도 끝이 없는 '추락'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추락'의 형벌이 내려진 그를 실제로 보기는 두렵다. 그가 전에 나에게 준 견딜 수 없는 상처 때문이 아니다. 상상계 속의 그는 '추앙' 속 타자와 마찬가지로 시간으로 인해(모든 걸 변하게 하는 시간.) 현실과 간극이 존재할 것이다. 만약 현재로 그의 현존이 돌아와 나와 대면했을 때, 그의 추락의 흔적은 사라지고, 물성화는 사라지고 그는 마찬가지로 인간으로 되돌아오게 될 것이다. 한없이 추락했던 타자가 다시 나와 인간으로서 대면한다는 사실에 겁먹게 된 것이다. 시간으로 인해 현실 속 그에게 추락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면.. 나는 좌절하고 말 것이다.
이렇듯 타자의 변화에 대한 대면은 '추앙'이든, '추락'이든 상상계의 산물을 '무'화시켜 버린다. 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삶을 위해 열심히 가꾸어 두었던 상상계를 한순간 무너지게 만드는 대면. 나는 그것을 두려워한다.
누군가는 이 간극을 극복하고 다시 현재를 똑바로 마주 보면 되지 않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상적인 말이다. 마치 전쟁은 절대 일어나면 안 된다는 문구를 우리는 한없이 반복하지만 이 세계는 끊임없이 전쟁을 반복하는 것처럼 말이다.
결코, 나는 이 간극을 매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