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가의 바위들

인연에 대해

by Alexey

최근엔 글을 썼다가도 발행하지 못하고 그저 남겨두기만 한 글들이 저장 보관함들에 가득 쌓여있다. 똑같은 주제에 대해서 다르게 써본 글들도, 다른 주제에 대해서 장황하게 써본 글들도, 여러 번 글을 쓰려고 시도를 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는 연유로 낙담에 차 있었다.

그렇게 침울해하고 있던 찰나에 '이런 글을 써보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샤워 중 욕실을 꽉 찬 수증기처럼 머릿속을 꽉 채우며 갑자기 떠올랐다.


이미 10월은 지나가고 벌써 11월의 초입에 들어섰지만 그래도 비교적 최근인 10월 후반에 내 생일을 맞이했다. 내 생일은 한 해의 끝자락에 있기에 생일이 지나고 나면 '아 벌써 한 해가 가는구나'라는 걸 직감할 수 있게 된다.

맞다. 조만간 23살이 된다. 나는 아직 그리 나이를 많이 먹었다곤 생각하진 않는다. 오히려 어른들이 말하길 가장 파릇파릇한 시기이며 가장 돌아가고 싶은 순간의 기로에 서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런가.. 스무 살 중반이나 후반에 든 사람들이 자신을 '화석'이나 '늙은이'라고 표현하는 말을 들으면 오그라들기도 한다.(누군가에겐 가장 돌아가고 싶은 순간일 수 있는 그 찰나를 폄하하는 것을, 설령 그게 자기 자신을 폄하하는 것이라도, 나는 그리 달갑게 볼 순 없었다)

다시 본래 말하고자 하는 바로 돌아와 보자면, 생일이라는 특정 순간이 주는 의미의 특이점으로, 그리 길지 않은 22살의 인생을 돌이켜 보게 해 주었다. 그렇게 22년이란 시간 속에 어느 하나의 동일한 키워드, 혹은 흐름들이 나에게서 관찰되는 것을 느꼈다.

나에게 남아있는 인연은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 극히 소수구나, 그리고 나는 한 번도 흘러간 그들에게 새로이 손을 스스로 먼저 뻗어본 적은 없었구나. 그들이 내게 다시 손을 내민 적은 있어도 결국 난 한 번도 흘러간 인연을 내 손으로 먼저 잡아본 적이 없었다.


'흘러가는 인연을 잡지 아니한다', 어찌 보면 매몰찬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아도 나는 그리 살아왔었다. 바꾸려야 바꿀 수 없는 하나의 특질이자 성격이다. 흘러간 인연을 잡지 않는다는 말이 누군가가 보기에 주체적이고 나를 위한 삶을 살아간다고 볼 수 있겠지만 정반대다.

나는 떠나가는(흘러가는) 사람이 아니라 기다리는 사람이다. 다시 돌아오길 기다리지만, 그리움에 사무치지만, 그 순간이 다시 돌아오길 고대하지만, 그 인연을 다시 이어 붙일 순 없는 노릇이다. 어찌 흐르는 물의 방향을 거스를 수 있는가. 그저 떠나가는 그대를 보고 메아리치듯 불러보는 수밖에 없다. 그 메아리가 그대에겐 들리지 않겠지만.(내 머릿속 상상계에서만 울려 퍼지니)


그리워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인연이 끊겼다면 끊긴 이유는 마땅히 있는 법이다. 그게 시간의 흐름 때문이든, 공통성(삶의 영역)이나 특수성(특수한 시간과 공간)의 부재이든.

그렇게 많이 끊어진 실타래 사이 그래도 견고히 지탱하고 있는 몇몇의 실들이 보인다. 그 실들은 다른 실들과는 달리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견고해지고 더욱 단단해지는 특징들을 보인다.

먼저 왜 그러한 특징을 보이는가를 논하기 전, 나에게 그런 인연을 남겨준 그분들에게 감사함을 표한다. 아직도 부족하고 투정만 가득한 이런 사람에게 먼저 다가와 주고, 손을 내밀어 주고, 꾸준히 연락해 주는 그들이 있기에 나 자신이 내 속에 고립되지 않고, 우울에 빠지지 않고, 열등감에 빠지지 않고, 삶을 지속해 나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


들어가기 앞서, 특징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서두에 하고자 한다. 이 특징들은 개별적인 특징들이 아닌 순차적인 관계다. 즉 어느 하나의 통로로 가기 위한 길목들이다. 그렇기에 각 특징들은 개별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 단계적 관계로 봐주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첫 번째로는 우연이다. 가장 중대하고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우연이다. 전에 에릭 로메르에 대한 영화 상영 후 대화 속에서 이런 말을 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사랑이란 우연의 연속성 속에서 태어난다', 우리는 우연적인 순간이 연속적으로 지속되는 경우, 우리는 그것을 기호화하고 의미화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그런 순간의 연속을 절대 무의미로 단순 방치할 수 없기에 그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사투를 하고 그것은 사랑으로 발전한다는 의미였다.

여기서 우린 우정과 사랑에 대한 교집합적인 부분의 존재성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명제 또한 사랑과 우정이 공유하고 있는 한 속성이기에 '우정이란 우연의 연속성 속에서 태어난다'라는 명제로 변환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사례들은 문학, 영화, 시, 그림 등의 예술에선 만연히 다루는 주제들이며, 단순하게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흔히, 아니 대부분의 인연(흘러간 인연도 포함해서) 또한 이런 형태로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공통성이다. 우리가 특수적인 상황 속에서(우연 속에서) 만났다면 그 우연을 이어가기 위한 공통성이 존재해야 한다. 예외적으로 그 우연이 너무나도 특이하진 않고서는(그 시간 자체가 공통점으로 작용하는 수준) 그 우연을 이끌어 가기 위한 공통점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인연을 끌고 가기 위한 동력이 부족하다. 대화가 부족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인연의 열쇠는 '대화'다. 대화의 소재가 떨어지는 순간, 그 인연은 부동성을 띠지 않고 점점 흘러가고 떠밀려가기 마련일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는 대화의 소재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관심사, 취향, 취미 등이 인연 속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같은 소재에 대한 관심사를 공유한다면 관심사 속에서 나타난 새로운 것에 대한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고 대화는 점점 연장성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세 번째는 헌신성(지속성)이다. '흘러간 인연을 잡진 않는다'는 말이 '내게 남은 소중한 인연을 방치하고 손을 놓는다'는 말과 동어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그저 흘러간 인연들에 대한 후회와 한탄으로 점철되어 있는 '나'는 남아있는 소중한 인연이 떠나가질 않길, 흘러가질 않길 바라기에 아직 우리가 각자의 시간 속의 길로 흩어지지 않은 그 순간에 대해 헌신을 다 해 노력한다.

그리고 만약, 시간이 우릴 흩어지게 한다고 하더라도 미소 지으며 살아가게 할 그 추억, 그 순간만큼은 나의 머릿속에 영원하기에 순간을 믿어보려 최대한 노력한다.(이런 맥락에서 가장 흠모하는 밴드, 언니네 이발관의 최애 앨범 또한 언니네 이발관의 4집, <순간을 믿어요>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흘러가는 강물 속에서도 강변에 우뚝 자리 잡고 있는 바위 같은 인연들이 생겼나 보다.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을, 강물의 흐름을 버텨내려고 노력하는 그들과 나, 떠밀려가면 되돌아올 수 없기에 떠밀려 내려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나와 그들, 머릿속에 그런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강물이 완전히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그 바위들이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기를..


왜 이런 주제로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일까.. 그건 아마도 목욕을 마치고 수증기 가득한 화장실을 나오며 맡았던 10월 말의 가을이자 초겨울 내음을 맡았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잊고 싶었지만 잊고 싶지 않았던 과거 날들에 대한 추억이 계절 향기와 함께 향취에 젖었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혹은 언니네 이발관의 <생일 기분>이란 노래처럼, 생일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별 이유도 없이 허전함을 느껴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