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와 듣기 사이에서
요즘은 참 편안하다.
휴대폰의 연락 적어진 요즘, 나 혼자, 오롯이 나와 대면해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어쩌면 '편안함'과 '고독'은 같은 말일지도.
여행을 다녀온 뒤, 그렇게 편안하고도 고독한 나날들, 혹은 조금은 쓸쓸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이 쓸쓸함에 나를 묻어, 조금의 기쁨도 얻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만큼 슬픔도 늘어간다.
‘쓸쓸함’이란 다분히 반대되는 감정들을 서로 밀어내지 않고, 적절하게 융화시킨 감정이다.
요즘 주를 이루는 일상 패턴은, 어둑한 골방에서 시간 보내기.
그 속에선, 책, 영화, 엘피 플레이어로 노래 감상, 가끔의 유튜브..
사람과 대화를 잘 하지 않아, 어느 순간 밖에 나갔을 때, 나 자신이 과거에 어떻게 말했는지 까먹는 경우가 있다.
말이란, 의식 속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긴 보단, 보다 즉흥적이고 반응적인 것이기에, 어느 상황에 대한 반사적인 피드백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 그에 반해, 요즘의 나는.. 그 반응적인 순간에 딜레이가 걸리고 만다.
'아, 전에 이런 상황 속에서 내가 어떻게 말했던가?', 골똘히 떠올려보면 뿌옇게 떠다니는 연기 속을 헤엄쳐 다니는 듯, 어느 이미지도 머릿속엔 떠오르지 않는다.
마치 숨 쉬는 걸 의식적으로 행하려고 할 때, 범하는 오류와 비슷하달까?
영화는 말한다, 책은 말한다, 노래는 말한다, 각자의 언어로.
나는 듣는다, 단적인 수용자의 위치.
(마치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페르소나 속, 엘리자벳과 같이)
평소에 다른 사람의 말들을 이리 잘 들어주었다면..
왜 나는 다른 사람들 앞에선 봇물 터지듯, 말을 쏟아내는 것일까?
침묵이 두려운 것일까, 아니면 수용자의 위치에만 있던 나에게 드디어 말할 기회를 주어서 그런 것일까?
어느 날 친구와의 대화 중, 이런 말을 건넨 적이 있다.
“왜 사람들은(실은 나는) '나'라는 말을 대화 속에서 계속해댈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와중에도, '나는 말이야', '나 같으면', '나 같은 경우에는'.
머릿속으로 굴리는 쳇바퀴.
잘 듣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나' 내세우기 멈추기, 다른 말로는 상대의 존재를 오롯이 인정해 주기.
아마도 이것이 가능해야, 상대나 타인, 세계 또한 나를 온전히 이해해 주고 인정해 주지 않을까, 그래야 타인도 내 이야기를 온전히 잘 들어줄 준비가 되지 않을까.
잘 말한다는 건, 잘 듣는다는 것.
좋은 영화를 만든다는 것도 그런 거 아닐까.
잘 듣는다는 것, 이 세상 속의 목소리를 잘 듣는 것.
'나 좀 들어주세요!'라고 외치는 그 목소리를 내 목소리로 누르지 않고, 잘 듣기.
잘 기억해두고, 맘에 새겨두자.
PS. 오늘의 추천곡, Chet Baker & Paul Bley - Everytime We Say Goodbye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