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마음의 수리법

18화 추억은 손에 잡히는 빛

by 와이즈

내게는 취미가 있다.
해마다 그해 찍었던 사진들을 인화해, 예쁜 앨범에 차곡차곡 모으는 일.
그렇게 한 해가 끝날 때마다 작은 의식을 치르듯, 지난 시간을 종이에 옮겨 담는다.
손바닥만 한 종이에 담긴 장면들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그때의 공기와 감정을 고스란히 붙잡아둔 흔적이다.

사진을 고를 때면 늘 웃음과 망설임이 뒤섞인다.
저녁노을 앞에서 활짝 웃던 얼굴은 금세 고르고,
무심히 찍혔던 일상은 잠시 머뭇거리게 된다.
하지만 앨범 속에는 웃음만 있어선 안 된다고 믿는다.
찡그린 얼굴, 흐린 날의 거리, 비어 있는 식탁도 넣는다.
그래야 앨범이, 그리고 내 한 해가 진실해진다.

이렇게 쌓아둔 앨범을 가끔 펼쳐보면,
사진 속에는 단순히 ‘그때의 나’만이 있는 게 아니다.
함께 웃던 사람들의 목소리, 지나간 계절의 냄새,
그 순간엔 몰랐던 소중함까지 살아난다.
그게 추억이 가진 힘이다.
추억은 먼지 쌓인 기록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도 다시 숨을 쉬는 생명체다.

추억은 사실 늦게 빛난다.
그때는 너무 당연했던 장면들이, 지금 돌아보면 가장 눈부신 풍경이 된다.
아버지와 마주 앉아 먹던 늦은 저녁,
친구들과 웃으며 걸었던 골목길,
책상 위에 엎드려 꾸벅꾸벅 졸던 오후.
사소해서 잊힌 순간들이, 사진 속에선 오히려 더 크게 다가온다.

앨범을 덮고 나면 마음이 이상하게 단단해진다.
추억은 나를 붙드는 닻 같은 존재다.
그게 있기에 흔들려도 다시 균형을 잡는다.
내가 걸어온 발자국을 확인했기에, 앞으로도 걸어갈 힘을 얻는다.

지금 이 순간이 훗날 어떤 빛으로 다가올지 모르지만,
언젠가 반드시 다시 살아날 걸 알기에.
추억은 그렇게 늦게 빛나며, 우리를 지탱한다.


앨범 속 사진을 넘기다 보면, 웃음만 있는 건 아니다.
나는 가끔 너무 아파서 오래 바라보지 못하는 사진들을 만난다.

한 장은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부엌에서 과일을 깎아주시던 모습,
손에 칼을 쥐고 있으면서도 내 쪽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던 얼굴.
그 웃음은 여전히 선명하지만, 이제는 다시 마주할 수 없다.
할머니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사진 속에서는 언제나 따뜻한데, 현실에서는 더 이상 그 온기를 느낄 수 없다.
그 사실이 사진을 빛나게도 하고, 동시에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또 다른 한 장은 오래전에 멀어진 친구와 함께 찍은 것이다.
학교 운동장에서 장난스럽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모습.
그때는 평생 함께할 줄 알았다.
하지만 사소한 오해와 상처가 쌓이며, 우리의 길은 갈라졌다.
지금은 연락조차 닿지 않는다.
사진을 볼 때마다 묘한 감정이 스친다.
“그때 내가 좀 더 솔직했더라면, 달라졌을까.”
추억은 때로 후회와 함께 빛난다.

이처럼 추억은 따뜻함만 주는 게 아니다.
그 안에는 상실의 그림자, 미안함의 흔적,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무게가 함께 담겨 있다.
나는 그 사진들을 덮을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동시에 깨닫는다.
그 무거움조차 나를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을.

추억은 단순히 과거를 붙잡는 일이 아니다.
추억은 지금의 나를 흔들고, 내일의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때로는 웃음으로, 때로는 눈물로, 추억은 계속해서 나를 가르친다.

추억은 따뜻함과 아픔을 동시에 품는다.

상실의 그림자, 미안함의 흔적,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무게가 함께 스며 있다. 앨범을 덮는 순간 마음이 무거워지지만, 동시에 깨닫게 된다. 그 무거움조차 살아 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추억을 정리하는 일은

단순히 과거를 모으는 게 아니다. 마음을 정리하는 과정이다. 어떤 시간을 잃었는지, 어떤 시간을 품었는지 확인하는 시간. 그 과정을 통해 슬픔을 직시하고, 그리움을 견디며, 상실을 받아들이는 힘을 배우게 된다. 그래서 추억을 정리한다는 건 곧 자신을 치유하는 일이다.

앨범을 통해 걸어온 발자국을 확인했기에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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