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수거 날이면 늘 손에 비닐봉지가 가득하다. 과일 하나, 과자 한 봉지에도 포장은 겹겹이 붙어 있다. 나는 그걸 죄책감처럼 모아 배출한다. “일회용품을 줄이자”라는 구호는 늘 소비자에게 향한다. 하지만 문제의 뿌리는 개인이 아니라 기업이다. 기업은 유통 효율과 이익을 위해 과잉 포장을 기본으로 삼았다. 나는 쓰레기를 배출하는 주체처럼 보이지만, 사실 시스템이 떠넘긴 결과를 매일 처리하고 있는 셈이다. 플라스틱과 같은 일회용품의 소비를 줄이자고 하면서 소비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은 덜 주목받는 다.
층간소음도 그렇다. 흔히 이웃 간의 예의 문제로 치부되지만, 실제로는 건설사와 제도의 문제다. 아파트는 소리를 잡을 수 있는 자재나 구조적 장치를 최소한으로만 적용해 지어진다. 방음 설계에 비용을 더 들이지 않기 위해서다. 그 결과 아이가 집에서 뛰는 소리는 곧장 아래층의 불면으로 이어진다. 소음이란 물리적 문제는 제도의 빈틈에서 생겨난다. 하지만 불편을 감당하고 싸워야 하는 건 결국 주민들이다.
내 불만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불편의 원인을 서로에게 돌리도록 훈련받는다. 쓰레기는 내가 많이 만들어서 문제고, 층간소음은 이웃이 예의가 없어서 문제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 불편의 근원은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기업의 이익, 제도의 미비, 비용 절감의 선택이 쌓여 일상을 불편하게 만든다.
불만은 결국 이런 구조를 향한 저항이다. 내가 짜증 내는 것은 단순히 쓰레기봉투와 발자국 소리 때문이 아니다. 내 불만은 “왜 책임이 늘 개인에게만 전가되는가”라는 질문에서 비롯된다. 불평은 사소한 소음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기업은 이익을 챙기고 떠나지만, 갈등은 남은 사람들이 감당하는 시스템을 향한 정당한 문제 제기다.
학교에서도 이런 구조는 반복된다. 교권 문제는 흔히 ‘교사의 인성’이나 ‘학생과 학부모의 태도’로 설명된다. 하지만 교사의 권한과 책임을 불균형하게 만든 건 제도다. 학생 인권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교사의 권위가 무너진 구조 속에서 교사들은 수업보다 갈등 조율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학생과 교사도 보호해 주는 장치가 마련되지 않으면, 결국 교육은 개인의 헌신과 인내 위에서만 버티게 된다.
내 불만은 늘 같은 뿌리를 가리킨다. 불편과 갈등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시스템의 설계에서 비롯된다. 그럼에도 불만의 화살은 늘 개인을 향한다. 쓰레기를 많이 버리는 건 나, 소음을 내는 건 이웃, 문제를 일으키는 건 교사나 학생. 이렇게 문제를 좁히는 순간, 시스템은 면죄부를 얻고 개인들만 서로를 탓하며 소모된다.
불만을 말한다는 건 불평을 늘어놓는 게 아니다. 그것은 책임의 방향을 바로잡는 일이다. 나의 불만은 사실상 질문이다. “왜 우리는 시스템이 만든 문제를 서로의 탓으로만 돌리는가?”라는 질문 말이다. 불만을 외면하면 갈등은 계속 개인의 몫으로 남는다. 하지만 불만을 시스템에 연결할 때, 비로소 변화의 출발점이 된다.